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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 태 구(서울대 규장각 학예연구사)


『화기도감의궤』는 1614년(광해군6) 7월부터 1615년(광해군7) 5월까지, 화기도감(火器都監)에서 수행하였던 화약병기(火藥兵器)의 제작 과정을 기록한 의궤이다. 현재 서울대 규장각한국학연구원이 소장 증인 『화기도감의궤』(奎 14596)는 당시 제작된 9건의 의궤 가운데 하나로, 원래 강화도 사고(史庫)에 보관된 것이었다. 이 의궤는 17세기 전반 조선의 병기 제조 및 국방 태세를 파악하는 데 유용하게 활용할 수 있는 자료로서, 제작이 완료된 화기의 종류별 수량과 그림, 화기도감의 조직과 인원, 주요 원료와 재원의 조달, 각종 장인(匠人)의 생산량 등 풍부한 정보를 담고 있다. 
화기도감이 설치될 무렵의 조선은, 누루하치의 통솔 아래 급속히 성장한 건주여진(建州女眞)과의 군사적 긴장이 점차 고조되던 시기였다. 조선은 건주여진의 기마병을 평지에서 정면으로 상대할 경우 승산이 희박하다고 판단하였다. 따라서, 방어가 쉬운 험준한 지형을 선점하여 축성(築城)한 뒤 이곳에서 지구전을 펼치고자 하였다. 화기도감은 이러한 방어 전략의 실행에 없어서는 안 될 화약병기를 단 기간 내에 대량으로 제조하기 위해 설치된 임시 관청이었다. 

 화기도감은 약 11개월 간의 작업 끝에 총 6종의 화약병기를 제작하여 각 지방의 군사 거점과 중앙에 비축하였다. 이 때 제작된 화약병기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첫 번째 병기는 불랑기(佛狼機)라는 대포이다. 불랑기사호(佛狼機四號) 모포(母砲) 50개가, 사호자포(四號子砲) 250개와 함께 제작되었다. 그리고 이보다 크기가 작은 불랑기오호(佛狼機五號) 모포 50개가, 오호자포 250개와 함께 제작되었다. 모두 철환 1개를 넣어 발사하였다. 불랑기사호 모포의 무게는 90근(斤: 1근은 약 600g), 길이는 3척(尺: 1척은 영조척으로 약 30.65㎝) 1촌(寸) 7분[分]이었다. 불랑기오호 모포의 무게는 60근, 길이는 2척 6촌 5분이었다. 불랑기는 프랑크(frank)의 한자식 표기였다. 명나라 사람들이 유럽인들을 프랑크라고 불렀던 데에서 유래한 명칭이다. 불랑기는 당시 유럽인들이 보유하였던 화포를 지칭하였다.



『화기도감의궤』의 불랑기(佛狼機)
 


 불랑기는 포신(砲身)에 해당하는 모포(母砲)와 탄환과 화약을 채워 넣는 자포(子炮)가 분리되는 구조적 특징을 갖고 있었다. 모포 하나에 여러 개의 자포가 딸려 있어서, 전투시에는 모포 후면 상단에 있는 구멍에 탄약이 장전된 자포를 끼워서 점화를 하는 구조였다. 그러므로, 기존의 화포에 비해 발사 간격이 짧았고, 포신에 가늠자와 가늠쇠가 달려 있어서 명중률도 높았다. 모포와 자포가 분리되는 구조였기 때문에, 모포와 자포의 구경(口徑)이 일치하지 않거나 결합이 부적절할 경우에는 정상적인 발사가 어렵다는 단점도 있었다. 모포는 동철(銅鐵)로, 폭발시의 높은 압력을 견뎌야 하는 자포는 강도와 점성이 높은 정철(正鐵)로 제작하였다. 임진왜란 중에 명군(明軍)으로부터 본격적으로 전래되어, 17세기 이후에는 조선군의 주력 화포로 사용되었다.  

 두 번째 병기는 현자총통(玄字銃筒)으로 50개가 제작되었다. 동철로 제작되었다. 무게는 70근, 길이는 2척 3촌 5분이었다. 조선 태종대에 처음 제작되었으며, 당시 조선에서는 천자(天字)·지자(地字)총통 다음으로 큰 대포였다. 철환(鐵丸) 100개를 넣어 발사하거나, 차대전(次大箭) 또는 은장차중전(隱藏次中箭)이라는 큰 화살 1개를 넣어 발사하였다. 수성용(守城用)으로 성곽에 거치하여 사용하였을 뿐만 아니라, 판옥선과 거북선에 탑재하기도 하였다. 

 세 번째 병기는 백자총통(百字銃筒)으로 20개가 제작되었다. 동철로 제조되었다. 무게는 28근, 길이는 2척 7촌이었다. 철환(鐵丸) 15개를 넣어 동시에 발사하였다. 임진왜란 당시 명군이 평양성을 탈환할 때 불랑기와 함께 사용한 기록이 보이는데, 이후 조선에서 계속 제작되었다. 

네 번째 병기는 삼안총(三眼銃)으로 203자루가 제작되었다. 정철로 제작하여 폭발 시에 총신의 파열을 방지하였다. 무게는 7근 반, 길이는 1척 4촌 8분이었다. 임진왜란 중에 명군으로부터 전래되었다. 세 개의 총신(銃身)이 하나의 손잡이에서 뻗어 나간 특이한 형태 때문에 삼안총 또는 삼혈총(三穴銃)이라고 불렀다. 각 총열에 철환 1개씩 넣어 발사하였다. 불씨를 손으로 점화하는 개인화기로서, 당시 조총(鳥銃) 다음으로 애용되었다. 기병도 많이 사용하였다.

 

『화기도감의궤』의 삼안총(三眼銃)
 

 다섯 번째 병기는 소승자장가(小勝字粧家)로 306자루가 제작되었다. 정철로 제작하였다. 무게는 7근, 길이는 2척이었다. 철환 1개를 넣어 발사하였다. 소승자장가는 기존의 승자총통을 개량한 것으로, 조총(鳥銃)의 여러 장점을 채택·적용한 것이 특징이다. 조성(照星: 조준장치에 해당)을 정밀하게 만들었고, 장가(粧家: 개머리판에 해당)도 부착하여 일본군이 사용하는 조총과 다름없는 형태를 갖고 있었다. 여섯 번째 병기는 쾌창[快鎗]으로 724자루가 제작되었다. 정철로 제작하였다. 무게는 8근, 길이는 2척 4촌이었다. 쾌창 역시 불씨를 손으로 점화하는 개인화기의 일종이었다. 명중률이나 관통력이 조총에는 못 미쳤으나, 유사시 타격무기인 곤봉으로 전용할 수 있는 장점이 있었다.

 

『화기도감의궤』의 소승자장가(小勝字粧家)

 



박 권 수(충북대 교수)

 
택지(擇地), 즉 길한 땅을 택하는 일은 국가의 의례가 행해지는 공간을 설정하는 일이다. 조선시대 사람들은 왕실 의례를 수행하는 데에 필요한 공간이 적절하게 선택되어야 만이, 혹은 적절하게 보이는 논리를 가지고 정해져야 만이 해당 의식이 온전하게 진행될 수 있고 의례의 진정성이 달성될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그러므로 왕실 의례가 온전하게 행해질 수 있는 ‘적절한’ 공간을 결정하고 그 공간이 어떠한 논리로 해당 의례에 적합한 공간인지를 설명하는 일이 바로 관상감(觀象監)이 맡은 택지, 혹은 감여(堪輿)의 업무였다.


서울 관상감에 설치되었던 관천대(觀天臺),
종로구 원서동 206번지 소재

 조선시대의 왕실의례 중에서 택지, 즉 길한 땅을 정하는 일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일은 바로 국왕의 장지(葬地)를 결정하는 문제였다. 국장의 과정은 여타의 의례에 비해 훨씬 많은 물력과 인력이 동원되고 그 기간도 5개월이 소요되는 막중한 예식이었다. 일례로, 영조(英祖)의 국장 과정에서 발인에 동원된 여사군(轝士軍, 상여꾼)의 총 수는 무려 8,652명에 달하였다. 또한 당시 국장도감(國葬都監)과 혼전도감(魂殿都監), 산릉도감(山陵都監)의 활동에 소요된 물력을 모두 합하면, 미(米) 5,700석(石), 전(錢) 14,000량(兩), 목(木) 296동(同), 포(布) 14동(同)에 달하였다. 이처럼 막대한 인원과 물력이 동원되는 예식이었기에, 국왕의 장지를 어디로 설정할 것인가를 결정하는 문제는 국장의 전체 과정에서 가장 우선적으로 그리고 가장 신중하게 결정되어야 할 문제였던 것이다.
 
 관상감이 장지를 택정하는 과정은 일반적으로 미리 정해 놓은 국릉(國陵)의 후보지들을 살펴보는 일로부터 시작되었다. 『서운관지(書雲觀志)』(1818)에는 “국릉의 후보지라는 표를 세워둔 곳”을 언급하고 있는데, 이는 관상감이 국왕의 능이 들어설 수 있는 후보지로서 미리 장부에 기록해 놓았음을 의미한다. 따라서 국왕이 승하하고 나면 우선 관상감에서 미리 국릉의 후보지로 표를 세워 놓은 곳들과 과거 국장의 과정에서 길지로 거론되었던 곳들 중에서 적합한 곳을 골라서 신하들을 보내어 살펴보는 작업, 즉 간심(看審)을 여러 차례 행하였다. 물론 국릉의 후보지로서 장부에 기재되어 있던 곳 이외에도 길지라고 생각되는 여타의 후보지들도 함께 고려의 대상이 되었다. 그리고 이들 후보지들 중에서 최종적인 장지가 선택되기 위해서는 예조(禮曹)와 관상감의 관원들이 여러 차례 답사하고 논의하는 과정이 이루어져야만 하였다.

 조선의 국가의례를 규정하고 있는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1474)에는 국왕이 죽으면 “5개월이 지나서 장사를 지내”는데, 이를 위해 “미리 예조의 당상관(堂上官)과 관상감의 제조(提調)가 지리학(地理學) 관원을 거느리고 장사지낼 만한 땅을 가리고, 의정부(議政府)의 당상관이 다시 살펴서 임금께 계문하여 정하였다”고 적고 있다. 여기에 따르면, 국왕의 장지는 기본적으로 예조의 관리들과 관상감의 관리들이 먼저 후보지를 답사한 후에 그곳이 장사지낼 만한 땅이라고 판단하여 보고를 하면(1단계), 다음으로 의정부의 당상관이 다시 가서 살피고 난 후에 이를 임금에게 보고하여 최종적으로 결정하도록 하였던 것이다. 이런 규정들은 왕릉을 조성하는 전 과정을 문서화하여 정리한 『산릉도감의궤(山陵都監儀軌)』들의 장지결정 관련 조목들에서 비슷한 문구로 반복되어서 등장한다.
 
 장지가 최종적으로 결정되면, 관상감의 관원들은 길일을 잡아서 왕릉 후보지의 혈처를 중심으로 영역을 설정하고 그곳에다 표식을 해두는 일을 행하였다. 봉표(封標)의 과정은 다음과 같다. 먼저 능소(陵所) 후보지 영역의 네 모퉁이에 있는 흙을 파서 밖으로 퍼내고 가운데 부분의 흙을 남쪽으로 퍼낸다. 그리고 이 다섯 군데에 각각 표목(標木) 하나씩을 세워 봉표(封標)를 행하였으며, 이후 가운데 표목의 왼쪽에서 후토(后土: 土地를 맡은 神)에게 제사를 지냈다.[『國朝五禮儀』 卷7 凶禮 治葬 37a,  “以㝎擇日, 開塋域, 掘兆四隅外其壤, 掘中南其壤, 各立一標. 當南門立兩標, 觀象監官, 柌后圡於中表之左.”]. 이런 봉표의 과정들은 한편으로는 최종적으로 결정된 장지에 대해 관민(官民)의 주의를 요구하거나 혹은 그곳에 깃들어 있는 신들을 달래는 의식이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장지에 대한 최종적인 결정을 대내외적으로 공표하고 확정짓는 행위이기도 하였다. 이와 같이 택지의 과정, 즉 좋은 땅을 고르는 과정은 조선시대 왕실의 장례과정에서 빠질 수가 없고 또한 우선적으로 수행되어야 하는 중요한 요소였다.



『영조원릉산릉도감의궤(英祖元陵山陵都監儀軌)』의 표지 



박 권 수(충북대 교수)


 

 80년대까지만 하더라도 한국인들은 결혼식을 올리기에 길한 날을 무당이나 점장이한테 가서 받아오는 사람들이 많았다. 이른바 ‘날을 받는 풍습’이 그것이었는데, 이런 길일을 잡아서  결혼식과 같은 행사를 치룸으로써 사람들은 인생을 새롭게 출발하는 시점이 혹여라도 ‘마’가 끼인 날이거나 불길한 날이 되어서는 안된다고 생각했다. 만약 잘못 알고서 불길한 날에 의식을 행할 경우 앞날에 무슨 불행이 닥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따지고 보면 우리는 어떤 행사나 의식을 수행하려면 언제 그 행사나 의식을 시작할지를 미리 약속해놓고 행사를 수행한다. 하지만 막상 그 행사나 의식을 언제 시작할 것인가를 생각해보면, 사람들은 누구나 ‘좋은 때’를 골라서 행사를 행하고 싶어하는 법이다. 따라서 과거 한국인들이, 어떤 이들은 지금까지도 그러한데, 결혼식의 날짜로 길한 날을 잡기 위해 점쟁이나 무당을 찾아가는 것이 그다지 이상한 일만은 아니다. 
어느 날 어느 때가 행사를 수행하기에 길한 때인가를 따지는 풍속은 전통시대에는 생활의 깊숙한 부분에까지 중요하게 작동을 하고 있었다. 다시 말해 우리가 길한 날을 잡는 여러 풍속도 알고 보면 대부분 조선시대의 선조들이 그렇게 하던 풍습이 오늘날까지 남아서 내려온 결과이다. 

 조선시대에는 특정 ‘시각’이 해당 의식을 거행하기 좋은지 아니면 나쁜지 아주 엄밀하고 세밀하게 따졌다. 다시 말해 모든 의식과 행사는 반드시 길일(吉日), 즉 길한 날과 길한 때를 잡아서 수행되어야만 했고, 그래야만이 앞으로의 일에 행운이 따르고 뒤탈이 없을 거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이사가기 좋은날, 지붕고치기 좋은날, 외출하기에 불길한 날, 집안의 담장을 고치면 불길한 날, 결혼식 하기 좋은날 등등 일상생활의 모든 일들에 대해 길한 날과 불길한 날을 따져서 거행했던 것이다.
 
 조선시대 사람들이 길일과 길시를 아주 엄밀히 따지는 풍습은 사실 왕실의례에서도 마찬가지였다. 특히 조선의 왕실의례에서는 결혼과 같은 기쁜 행사이건 국장과 같은 슬픈 행사이건 간에 일반적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여러 날에 걸쳐서 행사를 위해 동원되어야 했다.  따라서 왕실행사를 거행하기 위해서는 의식을 구성하는 모든 절차들에 대해 미시적(微視的) 단위의 길일과 길시가 엄밀하게 지정되어야 했던 것이다. 예를 들어, 국왕의 장례식의 경우에는 상여꾼들만 하더라도 수천 명이 동원되었고 무려 5개월 정도의 기간에 걸쳐서 의식이 진행되었다. 따라서 이러한 의식의 전 과정에서 국왕에서부터 상여꾼들에 이르기까지 의례에 참여하는 모든 인원들이 절차에 맞추어 각자가 역할을 수행해야 하는 정확한 시점을 알려주지 않는다면, 우왕좌왕하여 행사가 제대로 진행될 수가 없었던 것이다. 게다가 이들 각각의 일시들은 왕실의 행사였던 것만큼 더욱더 길한 날로 택해져야만 했다.


현륭원 원소택일별단

 

 이와 같은 길한 날과 길한 때를 잡는 일을 조선시대에는 택일(擇日)과 택시(擇時) 업무라고 현륭원 원소택일별단 하였고, 관상감(觀象監)이 그 일을 담당하였다. 관상감에서는 왕실에서 거행되는 대부분의 의식에 대해 의식을 구성하는 여러 절차들에 
필요한 날자와 시각을 정하여 ‘택일단자(擇日單子)’로 작성하여 국왕에게 올려야 했다.
 
일례로, 국왕의 장례의 경우 얼마나 많은 날짜들이 택일되어야 했는지 살펴보자. 
사도세자의 묘를 지금의 융릉 자리에 옮기는 일을 수행하였던 현륭원(顯륭園) 천원(遷園)은 1789년에 이루어졌다. 이 현륭원 천원의 의식을 수행하기 위해 관상감에서는 1789년 7월 11일 원소택일단자(園所擇日別單)를 적상하여 보고하였다. 여기에는 천원(遷園)의 일을 시작하는 ‘시역일(始役日, 7월 20일 辰時), 참초파토(斬草破土, 묘를 새로 쓸 곳의 풀을 베고 땅을 파내는 일, 7월 26일 巳時), 땅의 神에게 祭祀를 지내는 사후투(祀后土, 참초파토(斬草破土)와 같은 날 수행), 원상각(園上閣, 옹가(甕家) 즉 묘를 쓸 혈(穴) 자리 위에 설치하는 구조물)을 설치하는 일(8월 26일 巳時), 개금정(開金井, 하관(下官)할 혈처의 땅을 파는 일, 10월 초3일 午時), 성빈(成殯, 외재궁(外梓宮)이 천원(遷園)하는 곳에 도착한 후에 머무를 빈소(殯所)를 설치하는 일)시에 꺼려야 할 방위, 하현궁(下玄宮)의 일시(임금의 관(棺)인 재궁(梓宮)을 능에 마지막으로 묻고 봉인(封印)하는 일, 11월 2일 巳時)가 순차적으로 서술되어 있다. 마지막으로 택일단자(擇日單子)의 뒤 부분은 천원의 역에 참가하는 이들이 삼가해야 하는 방위와 적합한 방위, 특히 하현궁(下玄宮)하는 작업 시에 자리를 피해야 하는 생년(生年) 등이 서술되어 있다.

 이처럼 왕실의례를 구성하는 모든 세세한 절차들에 대해 길일이 잡혀야만이 행사가 원활하고 마땅하게 진행되어 행사의 주체들에게 행운을 가져온다고 믿었던 것이다.



양 진 석(서울대 규장각 학예연구관)



‘고임’이라 하면 역사를 공부한 사람들에게도 매우 생소한 단어이다. 사전을 찾아보면, “물건의 밑을 받쳐서 괴는 일 또는 물건”이라고 정의 되어 있다. 이 정도의 풀이로는 감을 잡을 수 없다. 앞에서 정의한 것과 연계해서 생각할 수 있는 것으로는 기껏해야 ‘굄대’, ‘굄목’, ‘굄돌’ 정도로 이야기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 주변에서 아직도 사용되고 있는 것이 있다. 결혼식 때 폐백으로 사용되고 있는 ‘대추고임’이다. 대추고임은 대추를 실로 끼운 것을 목기에 돌려 담아 사용하는 것이다. 그 외에도 돌잔치에 가면 돌떡을 높이 고여서 화려하게 상을 장식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1829년(순조 29)에 효명세자가 국왕인 아버지 순조의 40세와 즉위 30년을 맞이하여 이를 경축하기 위해 연향을 올린 기록인 『순조기축진찬의궤(純祖己丑進饌儀軌)』에서도 고임에 대한 기록들을 살필 수 있다.
 
 고임과 관련한 기록을 모두 살피기에는 지면상 힘들기 때문에, 내숙설소(內熟設所)에서 마련한 자경전진찬(慈慶殿進饌)만을 대상으로 살펴보겠다. 우선 대전(大殿)에 올려 진 것을 보면, 각색의 멥쌀 시루떡, 찹쌀시루떡, 조악(助岳, 주악)과 화전(花煎), 양색단자(兩色團子), 대약과(大藥果), 다식과(茶食果)와 만두과(饅頭果), 각색절육(各色截肉) 등은 각각 1개의 그룻에 담았으며 높이가 2자 2치이다. 이 외에도 삼색료화(三色蓼花), 유자와 귤, 석류는 2자 1치이며, 검은깨황률다식(黑荏子黃栗茶食)과 녹말송화다식(菉末松花茶食), 양색매화강정(兩色梅花强精), 양색강정, 삼색매화연사과(三色梅花軟絲果), 각색당(各色糖), 용안(龍眼), 여지(荔芰), 곶감, 밤, 대추, 잣(松柏子) 등은 그릇 1개에 높이가 1자 9치이고, 편육(片肉), 양전(羘煎) 및 해삼전, 간전(肝煎)과 어전, 전복홍합볶음(全鰒紅蛤炒), 각색화양적(各色花陽炙), 어채(魚菜), 삼색갑회(三色甲膾) 등은 1자 6치이며, 각색정과는 1자 1치이다.
 
 음식의 특성에 따라 고임의 높이가 달라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지위에 따라서도 음식의 종류와 고임의 높이가 달라지고 있음은 왕비, 세자 및 세자빈에게 올려진 것의 고임의 높이에서도 드러나고 있다. 

 우선 왕비에게 올려 진 것을 보면, 각색의 떡(餠), 각색의 조악 및 화전과 단자잡과떡, 약과와 만두과, 각색절육 등을 1개의 그릇에 담았으며 높이는 대전 보다 낮은 1자 5치이고, 삼색다식과 양색강정, 양색매화연사과, 각색당, 용안과 여지, 유자와 석류 및 배, 곶감, 대추와 밤, 잣은 1자 3치이며, 편육, 양전과 해삼전, 간전과 어전, 각색화양적, 어만두, 양색갑회은 8치, 조란과 율란 및 강란, 삼색녹말떡은 7치, 각색정과는 6치이다. 

 세자와 세자빈에게 올려진 것을 보면, 각색떡, 각색조악과 화전 및 단자와 잡과떡, 약과 및 만두과, 각색절육은 1자 7치, 석류와 배는 1자5치, 각색다식, 양색강정, 삼색매화연사과, 곶감, 대추와 밤, 는 1자4치, 편육, 양전과 해삼전, 간전과 어전, 전복홍합볶음, 각색화양적, 어만두, 양색갑회는 1자 1치, 삼색녹말떡은 9치, 각색정과는 6치인데, 각각 2그릇을 올렸다.
 
 명온공주의 찬상은 각색떡, 각색절육은 1자 3치, 약과, 삼색매화연사과, 삼색료화, 석류와 배는 1자 2치, 삼색다식, 곶감, 대추와 밤은 1자, 편육은 8치, 양색전유화, 전복홍합볶음, 각색화양적, 양색갑회는 8치, 삼색녹말떡은 7치, 조란(棗卵)과 율란(栗卵) 및 강란(薑卵) 6치, 각색정과 5치이다.
 
 국왕을 비롯하여 왕비 및 세자와 세자빈 등 왕실 내에서의 각각 차지하는 지위에 따라 음식의 종류와 양들이 달랐으며, 한편 고임의 높이도 같은 음식이라 해도 왕실 내에서의 지위에 따라 달리 올려졌다. 고임은 화려한 겉모양과 함께 고급스런 품격을 보이면서 한편으로는 지위에 따른 크기의 차이를 통하여 권위를 드러내는 것이기도 했다.


순조기축진찬의궤자경전진찬도(慈慶殿進饌圖)」 



양 진 석(서울대 규장각 학예연구관)

 
‘탕(湯)’이라 하였을 때, 우리는 곰탕을 비롯하여 설렁탕 등과 같이 한식당에서 요즘 흔히 식당에서 즐겨 먹는 것들을 생각하게 되는 것이 일반적이다. 이러한 탕들은 우리 귀에 매우 친근하게 다가와 있기도 하며, 몇몇의 탕류들은 제작과정과 관련하여 각각의 이야기들을 담고 있다. 

 그런데 궁중의 연회에서 사용하던 탕류들은 매우 다양하였지만, 어떠한 것들이 있는지에 대해서는 소개된 글들이 많지 않다. 궁중의 탕류를 엿볼 수 있는 것으로는 『진찬의궤(進饌儀軌)』·『진연의궤(進宴儀軌)』·『진작의궤 (進爵儀軌)』 등과 같은 궁중연회와 관련한 의궤를 들 수 있다. 

 조선후기에는 왕실을 중심으로 여러 가지 명목을 들어 많은 연회들이 행해졌으며, 그 중에서 대표적인 연회로 많이 알려진 것은 1795년(정조 19)에 정조가 자신의 어머니 혜경궁 홍씨의 환갑을 맞은 시기에 맞추어 이미 사망한 아버지 사도세자가 묻혀 있는 현륭원(顯隆園)을 참배하고 아울러 화성에서 연회를 베푼 것을 들 수 있다. 그 과정은 『원행을묘정리의궤(園幸乙卯整理儀軌)』에 자세한 내용이 실려 있다. 이 시기는 혜경궁 홍씨의 환갑이면서 한편으로는 사도세자의 회갑을 드러내는 것이기도 하며, 자신이 즉위한 지 20년이 되는 해이기도 하였다. 정조는 이 행사를 이용하여 자신의 정치적인 입지를 더 굳게 하려고 하였다.
 
 정조대의 행사에 비하여 많이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1829년(순조 29)에 효명세자가 국왕인 아버지 순조의 40세와 즉위 30년을 맞이하여 이를 경축하기 위해 연향을 올린 것에 대한 기록이 있다. 『순조기축진찬의궤(純祖己丑進饌儀軌)』가 그것이다. 의궤들은 시대에 따라 작성 목적이 달랐으며, 각각의 특성들이 담겨져 있어서 구체적인 내용들도 달리 나타나고 있다.

 순조 대에 탕류로 올려 진 것은 종류가 매우 많았다. 그 중에서 각 개인에게 제공된 탕류의 종류만 하더라도 지위에 따라 매우 다양하였음을 살필 수 있다. 당해년도 2월의 연회에 제공된 것만 살펴보겠다. 주원외숙설소(廚院外熟設所)에서 마련한 명정전진찬(明政殿進饌)에서는 대전(大殿)에 올려 진 것으로는 열구자탕(悅口資湯), 만증탕(饅蒸湯), 완자탕(莞子湯), 고제탕(苽制湯), 추복탕(搥鰒湯), 저포탕(猪胞湯), 골탕(骨湯), 양탕(羘湯), 금중탕(錦中湯)이 있으며, 세자궁에 올려진 것으로는 칠계탕(七鷄湯), 잡탕(雜湯), 금중탕(錦中湯)이 있고, 연회에 참여한 제신(諸臣) 및 시위(侍衛)들에게는 잡탕(雜湯)이 주어졌다. 

 그리고 내숙설소(內熟設所)에서 마련한 자경전진찬(慈慶殿進饌)에서는 대전에 올려 진 것으로 금중탕(錦中湯), 잡탕(雜湯), 추복탕(搥鰒湯)이 있고, 내진헌(內進獻) 찬안과 세자궁과 세자빈궁에는 칠계탕(七鷄湯), 잡탕(雜湯)이 있었으며, 명온공주(明溫公主)와 숙선옹주(淑善翁主), 복온공주(福溫公主)를 비롯하여 덕온공주(德溫公主), 숙의박씨(淑儀朴氏), 영온옹주(永溫翁主)의 찬상(饌床)과, 내입상상(內入上床) 14상 및 청근현주(淸瑾縣主)와 내외빈 및 내외종친과 척신의 반사상상(頒賜上床) 및 연회에 참여한 여러 신하 및 반사연상(頒賜宴床) 중에는 여러 신하들의 상상(上床)과 여러 신하에게 반사한 상상(上床) 및 여러 신하의 중상(中床)에는 잡탕(雜湯)만 제공되었다.
이들 탕류들을 정리하면, 열구자탕(悅口資湯), 만증탕(饅蒸湯), 완자탕(莞子湯), 고제탕(苽制湯), 추복탕(搥鰒湯), 저포탕(猪胞湯), 골탕(骨湯), 양탕(羘湯), 금중탕(錦中湯), 칠계탕(七鷄湯), 잡탕(雜湯) 등이었다.
 
 1829년에 올려 진 탕은 이들 외에도 자경전야진찬(慈慶殿夜進饌), 자경전익일회작(慈慶殿翌日會酌), 주원내숙설소(廚院內熟設所)에서 마련한 자경전 정일진별행과(慈慶殿正日進別行果), 자경전익일회작진미수(慈慶殿翌日會酌進味數)등에서도 등장하고 있다. 이들 탕류들은 앞서의 것과 대체로 동일한 것들이었으나, 몇 가지 추가된 것으로는 생선화양탕(生鮮花陽湯), 돼지고기장방탕(猪肉醬方湯)를 들 수 있다. 이외에도 탕으로 간주되던 것으로 염수(鹽水)를 넣을 수 있으나, 순조 대에는 주원내숙설소(廚院內熟設所)에서 마련한 자경전 정일진별행과(慈慶殿正日進別行果)시에 대전진염수(大殿進鹽水) 조항에서 염수(鹽水)를 달리 다루고 있어서 제외하여야 할 것이다.
 
 의궤에 실린 탕과 관련한 종류만 하더라도 매우 다양하게 제시되고 있으며, 이들 탕류들의 명칭에서 살필 수 있듯이 매우 다양한 식재료들이 사용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그에 비해 현재 일반에 알려진 것은 몇 가지에 불과하다. 의궤에 탕류들을 제작하는 방법은 자세하게 실려 있지 않았지만, 이들 탕류들을 만드는 방법을 찾아내어 한국음식의 고급화와 함께 다양화를 추구하는 방법을 찾아봄직도 하다. 아울러 이와 같은 음식을 보다 규격화하고 한류와 연계시켜 국제적인 수준의 음식으로 개발함으로써 한국음식의 국제화도 함께 추진해볼 만도 하지 않을까?

순조기축진찬의궤에 기록된 자경전야진찬(慈慶殿夜進饌)중 잡탕(雜湯) 부분

 



양 진 석(서울대 규장각 학예연구관)

 

유형거는 다산 정약용이 설계하여 제작한 수레를 말한다. 다산 정약용은 조선후기 실학을 집대성한 인물로 잘 알려진 인물로서 그의 저술은 『여유당전서(與猶堂全書)』로 잘 알려져 있다. 그 중에서 대표적인 것으로는 『목민심서(牧民心書)』,『경세유표(經世遺表)』『흠흠심서(欽欽新書)』등이 있다. 그는 조선후기 사회의 개혁을 위해 힘을 썼을 뿐만 아니라, 경전을 새롭게 해석하려는 노력을 보인 인물이기도 하며, 그 외에도 과학기술을 도입하여 실제로 적용한 인물로서도 잘 알려져 있다. 정약용은 화성(華城, 지금의 수원성)을 축조에 자신의 학문을 실제적인 일에 적용할 수 있는 기회를 가졌고 큰 역할을 하였다. 

 이때 정약용이 제작한 것으로 잘 알려진 것은 기중기(起重機)의 역할을 하였다고 알려진 거중기(擧重機)를 들 수 있으나, 그 외에도 다산이 고안하여 자주 언급한 것으로는 유형거(游衡車)가 있다.

 다산 정약용은 유형거를 제작함으로써 무거운 짐을 적은 인원으로 쉽게 운반할 수 있다는데 큰 매력을 느꼈다. 우선 1대를 제작하는 비용도 100전을 넘지 않는다는 점과 함께, 그에 따른 부담도 민호에 고루 배정하게 되면 얼마 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사람을 고용하여 운반하면 백성들이 피해도 입지 않게 된다는 것이다. 즉 수많은 인력을 들이지 않고 몇 사람의 힘으로도 힘든 일을 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특히 산에서 석재(石材)를 채취하거나, 산림(山林)에서 목재를 베어 운반할 때 부역을 크게 줄 일 수 있다는 점은 그에게 유형거를 매우 효율적인 기계라고 생각하게 하였다.


『화성성역의궤』속의 유형거

 위의 그림은 화성을 축조하는 데 따른 논의과정 및 제반 공문서들을 기록하고, 아울러 그에 따른 인력을 비롯하여 비용들도 자세하게 담고 있는 『화성성역의궤(華城城役儀軌)』에 실린 유형거의 모습이다. 

 유형거와 관련하여 의궤를 통하여 알 수 있는 것은 국왕이 유형거 1량(輛)을 제작하여 내렸고, 수원부에서는 이를 모방하여 10량을 더 주조하였음을 밝히고 있다. 이는 유형거의 필요성이 매우 컸음을 말해주는 것이라 하겠다. 

 유형거의 장점은 짐을 실고 운반하는 데에 따른 편의성 정도에만 그치지 않았다. 짐을 싣고 경사지를 쉽게 올라갈 수 있도록 설계되었으며, 운반에 따른 효율성도 고려된 것이었다. 게다가 바퀴에 복토를 달아 짐을 싣는 판이 항상 평형을 유지하게 하는 등 운반과정에서의 편의성 및 안정성을 모두 고려한 것이었다. 

 유형거는 수레가 갖는 문제점인 수레에 싣는 짐의 무게도 견딜 수 있도록 제작되었을 뿐만 아니라, 바퀴의 크기도 함께 고려된 것이었다. 무거운 돌, 벽돌, 복재 등을 운반하는 것을 고려하여 부서지지 않도록 튼튼하게 제작되었을 뿐만 아니라, 바퀴의 크기도 짐을 싣고 내리는데 편리하게 설계되었다.

 『화성성역의궤』에 따르면, 성 한 층을 한 바퀴 쌓는 데 약 3,600수레의 돌을 운반해야 하는데, 9층을 쌓으려면 32,400수레가 필요하였다. 그는 유형거 70대를 사용하여 하루에 3번씩 돌을 운반하면 154일 만에 모두 운반할 수 있다고 보았다. 이는 유형거가 운반에 따른 효율성이 매우 높아서 공사기간을 크게 단축시키는 역할을 하였으며, 비용절약에도 대단히 기여했음을 말해준다. 이와 같은 공기의 단축은 당시 역(役)을 져야 하는 백성들에게는 큰 도움이 되는 것이기도 했다.



양 진 석(서울대 규장각 학예연구관)

 

 열구자탕은 화로 모양의 신선로(神仙爐)에 여러 가지 어육(魚肉)과 채소를 넣어 끓인 음식으로 다채로운 색까을 띠고 있으며, 맛이 좋다는 의미에서 붙인 이름이다. 열구자탕을 소개한 책자들은 『소문사설(謏聞事說)』,『송남잡지(松南雜識)』, 『규합총서(閨閤叢書)』, 『시의전서(是議全書)』·『해동죽지(海東竹枝)』,『동국세시기(東國歲時記)』등을 들 수 있다. 이들 책 외에도 의궤나 등록으로는 1765년(영조 41)의 행사를 기록한 『(乙酉)受爵儀軌』과 『경현당수작시등록(景賢堂受爵時謄錄)』등을 들 수 있으며, 이후 『園幸乙卯整理儀軌』, 『內外進宴謄錄』,『高宗壬寅進宴儀軌』 등 다수의 의궤에도 등장한다. 

 열구자탕의 이치는 수화기제(水火旣濟)의 이치를 이용하여 화로를 만든 것으로, 여러 가지 채소를 한데 넣어 익혀 먹는 것이다. 이를 만든 이가 신선이 되어 속세를 떠나간 뒤에 세상 사람들이 그 화로를 신선로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열구자탕이 등장하는 빠른 의궤의 기록은 1765년(영조 41)에 등장하고 있다.

 1902년(광무 6)에 열린 행사를 기록한『고종임인진연의궤(高宗壬寅進宴儀軌)』 찬품(饌品) 항목에서 보이는 열구자탕은 궁중에서도 대전(大殿)과 황태자(皇太子)에게만 올리고 있다. 이로써 볼 때 열구자탕을 올리는 대상은 궁중에서도 매우 제한적인 대상에게만 올리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때 열린 진연에서도 열구자탕이 올려지는 것은 전설사(典膳司) 외숙설소(外熟設所)에서 담당하였던 중화전진연(中和殿進宴), 내숙설소(內熟設所)에서 담당한 관명전정일진연(觀明殿正日進宴) 등 여러 행사에서 등장하고 있다. 의궤 외에도 구체적으로 열자자탕이 올려졌음을 보여주는 자료로는 광무 5년~6년(1901~1902)에 작성된 『내외진연등록(內外進宴謄錄)』(奎 13012)이 있으며, 내용에서 신축년 즉 1901년(광무 5)에 열구자탕을 올린 대상들은 고종황제(高宗皇帝), 황태자(皇太子), 영친왕(英親王), 순빈궁(淳嬪宮)들이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열구자탕은 대전이나 황태자 등에게 올릴 때에는 진어미수(進御味數) 즉 찬품을 올리는 차례는 초미(初味), 재미(再味)에 주로 해당되었다. 이때 올려진 재료를 살펴보면 고종과 황태자에게 올린 것은 약간의 차이가 있다. 열구자탕이라 해도 같은 재료를 고집하였던 것은 아니었다. 왕실(황실 포함)에서의 등급에 따라 열구자탕에 넣는 재료의 종류와 양도 조금씩 달랐다.
 
 찬품단자(饌品單子)에 열거된 열구자탕의 재료들을 보면, 1기(器)에 소 안심고기(內心肉) ·대장(大腸)·곤자소니(昆者巽 : 소의 창자 끝에 달린 기름기가 많은 부분)·부화(浮花)·소밥통(羘領)·간(肝)·천엽(千葉)·돼지고기(猪肉)·돼지새끼(豬胎)·꿩(生雉)·묵은닭(陳鷄)·전복(全鰒)·해삼(海蔘)·숭어(秀魚)·게알(蟹卵)·표고(蔈古)·목이(木耳)·황화(黃花)·무(菁根)·미나리(水芹)·파(生蔥)·오이(靑瓜)·등뼈(背骨)·머리뼈(頭骨)·달걀(鷄卵)·녹말(菉末)·면(眞末)·참기름(眞油)·잣(栢子)·은행(銀杏)·호두(實胡桃)·황밤(黃栗)·대추(大棗)·박고지(朴古之)·도라지(桔莄)·간장(艮醬)·후추가루(胡椒末) 등 다양한 것들이 이용되었다.
 
 열구자탕 즉 신선로는 육류, 해물, 채소 등 다양한 재료를 이용하여 만든 궁중의 대표적인 음식으로, 현재는 우리의 음식의 고급스러움과 영양, 맛을 대표하는 음식이 되었다.


열구자탕 사진

 

강 문 식(서울대 규장각 학예연구사)

 
 관인(官印)은 국가 기관과 그 관원이 공적으로 사용하는 인장으로, 국가에서 생산된 공식 문서와 기록물의 내용을 확인하고 증명하는 목적으로 사용되었다. 의궤는 조선시대 국가의 공식 기록물이었으므로, 당연히 관인이 찍혀 있다. 단, 국왕에게 올리는 어람용(御覽用) 의궤에는 관인이 없고, 관청이나 사고(史庫)에 소장되었던 의궤에만 관인이 찍혀 있다. 
 
 규장각 소장 의궤 1,567건 중에서 목록 등을 통해 찍혀있는 관인의 내용이 확인되는 것은 모두 1,071건이다. 이 중에서 가장 많이 찍힌 관인은 ‘봉사지인(奉使之印)’인으로 588건이며, 그 다음은 ‘일품봉사지인(一品奉使之印)’으로 300건이다. 즉, 관인이 확인되는 의궤 1,071건 중 약 83%에 달하는 888건에 ‘봉사지인’과 ‘일품봉사지인’이 찍혀 있다.

‘봉사지인’은 봉명사신(奉命使臣)의 관인으로, 예조에서 다량의 봉사지인을 가지고 있다가 특수한 임무나 일시적인 일을 수행할 때, 또는 임시적으로 설치된 관청 등에서 사용할 합당한 관인이 없을 때에 쓸 수 있도록 하였다. 이는 예기치 못한 일들이 발생했을 때 사용할 수 있는 관인을 미리 준비하여 국정을 효율적으로 운영하기 위한 조치였다. 기록에 의하면 ‘봉사지인’은 주로 다른 나라에 파견되는 사신(使臣), 국가 행사를 주관하기 위해 임시로 설치된 도감(都監)의 관원, 각 진(鎭)의 병마절도사 등에게 지급되어 사용되었다. 또, ‘일품봉사지인’은 1품의 관계(官階)에 해당하는 직임을 맡은 관리가 사용할 수 있는 관인으로, 주로 의궤와 외교문서에서 그 용례를 찾아볼 수 있다. 이상과 같은 ‘봉사지인’과 ‘일품봉사지인’의 용도를 고려할 때, 의궤에 찍혀 있는 ‘봉사지인’과 ‘일품봉사지인’은 당시 조선의 관인 운영의 실례를 보여주는 중요한 자료라고 할 수 있다.
 
 한편, 규장각 소장 의궤 중에는 소수이지만 ‘이품봉사지인(二品奉使之印)’이 찍혀 있는 경우도 있다(총 18건). 1628년(인조 6) 편찬된 『[소무영사]녹훈도감의궤([昭武寧社]錄勳都監儀軌)』(규14583), 1748년(영조 24) 편찬된 『영정모사도감의궤(影幀摸寫都監儀軌)』(규13997), 1786년(정조 10)에 편찬된『문효세자묘소도감의궤(文孝世子墓所都監儀軌)』(규13924) 등이 ‘이품봉사지인’이 찍혀 있는 의궤들이다. ‘이품봉사지인’은 2품 품계에 해당하는 직임을 맡은 관리가 사용하는 관인이다. 따라서 ‘이품봉사지인’의 사례는 ‘일품봉사지인’의 사례와 더불어 당시 행사 운영과 의궤 편찬을 주관했던 도감의 위계(位階)를 간접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아닌가 추정된다. 하지만, 예를 들어 묘소도감의궤 중에도 ‘일품봉사지인’인 찍힌 경우가 있고 ‘이품봉사지인’이 찍힌 경우가 있는 등, 같은 종류의 의궤라고 해도 찍힌 관인이 항상 동일했던 것은 아니기 때문에 현재로서는 의궤에 찍힌 관인을 근거로 도감의 위계 차이 여부를 확언하기는 어렵다. 한편, 숙종대 편찬 의궤 중에 ‘사품봉사지인(四品奉使之印)’이 찍힌 의궤가 6건 있는데, 이들은 모두『선원보략수정의궤』들이다.

‘봉사지인’류 외에도 규장각 소장 의궤에는 여러 종류의 관인들이 찍혀 있다. 󰡔선원보략수정의궤󰡕의 경우에는 ‘종부시인(宗簿寺印)’(81건), ‘종부시도제조지인(宗簿寺都提調之印)’(4건), ‘종부시교정청지인(宗簿寺校正廳之印)’(1건), ‘종친부인(宗親府印)’(13건), ‘종정원인(宗正院印)’(10건) 등 『선원보략』의 수정과 의궤 편찬을 주관했던 기관의 관인이 찍혀 있다. 특히, ‘종친부인’은 대한제국 이전 고종연간에, ‘종정원인(宗正院印)’은 광무연간에만 나타나는데, 이는 이 시기에 󰡔선원보략󰡕 수정 업무가 기존의 종부시에서 종친부·종정원 등으로 이관됐음을 보여준다.

 의궤 소장처(분상처)의 관인이 찍혀 있는 경우도 있다. 예를 들면, 1611년(광해군 3)에 편찬된 『제기도감의궤(祭器都監儀軌)』(규14931)에는 ‘의정부인(議政府印)’이 찍혀 있고, 1643년(인조 21) 편찬된『영접도감반선색의궤(迎接都監盤膳色儀軌)』(규14576)에는 ‘사각장(史館藏)’, 즉 춘추관의 관인이 찍혀 있어서 본 의궤들의 소장처를 확인할 수 있다. 또, ‘장례원계제과(掌禮院稽制課)’의 인장이 찍힌 의궤들이 숙종·영조·순조·고종대에 나타나는데(총 5건), 이들은 모두 ‘진연(進宴)’·‘진작(進爵)’ 등의 연향 관련 의궤들로서 예조에 소장되었던 것을 알 수 있다. 이상과 같은 사례들은 의궤 겉표지 등에 기재된 개별 의궤의 분상처 기록과 함께 해당 의궤가 지금까지 어떤 과정을 거쳐 왔는지를 밝히는 데 중요한 근거 자료로 사용될 수 있다. 

 이밖에 특이한 관인이 찍힌 사례로는 1762년(영조 38)에 편찬된 『황단종향의궤(皇壇從享儀軌)』의 ‘황명유민지인(皇明遺民之印)’, 1776년(정조 즉)에 편찬된 『[장조]상시봉원도감의궤([莊祖]上諡封園都監儀軌)』(규13337)의 ‘공조낭청지인(工曹郎廳之印)’, 1795년(정조 19)에 편찬된 『원행을묘정리의궤(園幸乙卯整理儀軌)』와 1801년(순조 1)에 편찬된 『화성성역의궤(華城城役儀軌)』등의 ‘규장지보(奎章之寶)’·‘이문원(摛文院)’ 등을 들 수 있다.


: 원행을묘정리의궤표지,  
: 원행을묘정리의궤속의 규장지보

 



강 문 식(서울대 규장각 학예연구사)


  
 현재 규장각에 소장되어 있는 의궤 1,567건 중에서 원소장처, 즉 의궤들이 제작될 당시에 분상·보관되었던 기관이 어디였는지가 확인되는 의궤는 모두 1,183건이다. 그런데, 조선시대 의궤 분상처는 대한제국 선포를 전후로 변화된 모습을 보이므로, 이 글에서는 대한제국 이전과 이후로 나누어 의궤의 원소장처를 살펴보도록 하겠다. , 같은 종의 의궤라도 건별로 분상처가 다르기 때문에 건수를 기준으로 원소장처 내역을 정리하였다.
 대한제국 이전에 제작된 규장각 소장 의궤 1,284건 중에서 원소장처가 확인되는 987건의 원소장처 내역을 정리하면 [1]과 같다.

 [1] 규장각 소장 의궤의 원소장처-1 (대한제국 이전)

원소장처

수량(건)

원소장처

수랑(건)

어람

80

종부시

29

예람(시강원)

17

종친부

7

의정부

91

화성행궁

6

예조

125

규장각(비어람)

3

춘추관(예문관)

90

교서관

1

강화(정족산)

185

사복시

1

오대산

203

춘추관/태백산

1

태백산

148

987

  
 [1]을 통해, 원소장처별 현황을 살펴보면, 먼저 어람본의 수량이 사고나 관청 소장본에 비해 적은 것을 볼 수 있다. 이는 정조대 외규장각 설치 후 어람본 의궤들이 외규장각에서 보관되었다가 1866년 병인양요로 프랑스군에 의해 약탈된 상황에 기인한 것이다.
 의정부 소장본은 총 91건인데, 이 중 79건은 영조대 이전에 제작된 것이며 나머지 12건 중 11건은 철종·고종대에 편찬되었다. , 정조~헌종대 의궤 중에는 의정부 소장본이 1건밖에 남아있지 않다. 이는 의정부가 1757(영조 33)에 의궤 분상처에서 제외됐다가 1811(순조 11)에 다시 분상처로 지정되면서, 영조 후반~순조 전반에는 의정부에서 의궤를 소장하지 않았기 때문에 나타난 현상이다.
 예조 소장본은 125건 중 경종대 이전 것은 6건밖에 없고 나머지는 모두 영조대 이후 제작된 것들이다. , 춘추관 소장본도 90건 중 83건이 순조대 이후 제작된 것들이다. 영조대 이전 의궤 중 예조·춘추관 소장본이 많이 전해지지 않는 이유는 현재 분명하지 않지만, 의궤를 참고할 때 주로 예조와 춘추관 소장본을 참고했던 점을 고려해 보면, 아마도 참고용으로 자주 사용되는 과정에서 상당수가 유실되었던 것이 아닌가 추정된다.
외사고 소장 의궤들은 전체적으로 모든 왕대에 걸쳐 고르게 남아있는 가운데, 오대산사고본이 203건으로 가장 많고, 뒤를 이어 강화사고본이 185, 태백산사고본이 148건씩 전해지고 있다. 반면, 대한제국 이전의 적상산사고본은 규장각에 1건도 소장되어 있지 않은데, 이는 일제강점기에 외사고 장서를 통합되는 과정에서 의궤를 비롯한 적상산사고본 도서들이 이왕직(李王職)으로 이관되어 창경궁 장서각에서 보관되었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이밖에 종부시와 종친부 소장 의궤들은 모두 선원보략수정의궤들이며, 화성행궁에 소장되었던 의궤들은 원행을묘정리의궤(5)화성성역의궤(1)이다. 사복시 소장본은 원행을묘정리의궤이고, 교서관 소장본은 국조보감감인청의궤이다. 한편, 순조대왕추상존호순원왕후추상존호도감의궤(純祖大王追上尊號純元王后追上尊號都監儀軌)(13362)는 두 곳의 소장본이 섞여 있는데, 2책 중에서 제1책은 태백산사고본, 2책은 춘추관본이다.
 다음으로 대한제국 선포 이후 제작된 규장각 소장 의궤 283건 중 원소장처가 확인되는 196건의 원소장처 내역을 정리하면 [2]와 같다.
[2] 규장각 소장 의궤의 원소장처-2 (대한제국 시기)

원소장처

수량(건)

원소장처

수량(건)

어람

35

강화(정족산)

27

예람

30

오대산

5

비서감(비서원)

28

태백산

18

장례원(예식원)

7

적상산

8

의정부

14

규장각(비어람)

2

종정원

1

내각

1

 

 

196


 [2]을 보면, 어람용·예람용 의궤와 비서감(비서원장례원(예식원강화사고 소장본의 수량이 거의 비슷하게 남아 있어서 이곳들이 대한제국기의 기본적인 의궤 분상처였음을 확인할 수 있다. 다만, 어람용의 숫자가 더 많은 것은 융희연간에 퇴위한 고종에게 올려진 어람용이 제작된 것에 기인한 것으로 보인다.
 의정부 소장본은 광무연간 의궤가 13, 융희연간 의궤가 1건인데, 이는 융희연간에는 의정부가 의궤 분상처에서 거의 제외되었기 때문이다. 외사고 소장본 중에서 오대산사고본이 5건밖에 전해지지 않는 점이 주목되는데, 이는 아마도 1922년에 조선총독부가 일본 궁내청으로 반출한 의궤에서 오대산사고본이 가장 큰 비중을 차지했던 것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한편, 대한제국 이전 의궤에서는 규장각에 한 건도 없었던 적상산사고본이 8건이나 있는 소장되어 있는 것도 눈에 띈다.


 

평창 오대산 사고의 전경


 



강 문 식(서울대 규장각 학예연구사)



3종류의 의궤

널리 알려진 바와 같이 조선왕조 의궤는 국왕이 보는 어람용(御覽用) 의궤와 관청 및 사고(史庫)에서 보관하는 분상용(分上用) 의궤 등 2가지 종류가 제작되었다. 어람용 의궤는 분상용 의궤와 내용은 동일했지만, 국왕의 위엄을 높이기 위해 초주지(草注紙)에 붉은 인찰선을 사용하고 녹색 비단 표지, 놋쇠 변철, 국화동(菊花童)으로 장정(裝幀)하는 등 분상용 의궤와는 다른 모습을 띠었다. 또, 1897년 대한제국 선포 이후에는 황제국의 위상이 의궤 제작에도 반영되어, 황색 비단 표지의 황제용 의궤 외에 붉은 비단 표지의 황태자용 의궤가 별도로 제작되어, 황제용·황태자용·분상용 등 3종류의 의궤가 만들어졌다.
그런데, 왕위 계승자(왕세자 또는 황태자)를 위한 의궤가 별도로 만들어진 것이 대한제국 선포 후 처음 나타난 것은 아니었다. 1897년 대한제국 선포 이전, 즉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이 정치 일선에서 물러나고 고종의 친정(親政)이 시작된 1873년(고종 10)부터 이미 세자시강원(世子侍講院)에 올려지는 왕세자용 의궤, 즉 ‘예람용(禮覽用) 의궤’가 제작되고 있었다. 현재 규장각에 소장된 고종대 예람용 의궤 중 제작 시기가 가장 이른 것은 1873년에 만들어진 「고종신정왕후효정왕후철인왕후명성왕후상존호도감의궤(高宗神貞王后孝定王后哲仁王后明成王后]上尊號都監儀軌」<규 13458·13459>이다. 이 의궤 이후 대한제국 선포 전까지 만들어진 의궤들은 대부분 예람용 의궤가 별도로 제작되었다.

 
「고종신정왕후효정왕후철인왕후명성왕후상존호도감의궤」
(오대산 분상용 표지)

 예람용 의궤

예람용 의궤는 어람용 의궤와 동일한 방식으로 제작되었다. 즉, 녹색 비단 표지, 놋쇠 변철, 국화동 5개로 장정한 외형이나, 초추지에 붉은 인찰선이 그려진 책지(冊紙)를 사용한 것 등이 어람용과 완전히 일치한다. 그 결과, 앞서 언급한 󰡔고종신정왕후효정왕후철인왕후명성왕후상존호도감의궤󰡕 이후 만들어진 의궤들은 대부분 어람용 형태의 의궤가 두 건씩 제작되었다. 즉, 둘 중 하나는 어람용이고, 다른 하나는 예람용인 셈이다. 하지만 어람용이나 예람용 의궤에는 분상처가 따로 표시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의궤사목」을 통해 어람용과 예람용이 따로 제작되었음은 확인할 수 있지만, 현전하는 실물 중에서 어느 것이 어람용이고 어느 것이 예람용인지를 구분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아래의 도판은 규장각에 소장된 「보인소의궤(寶印所儀軌)」 중 어람의 형태를 갖춘 두 책의 첫 장을 비교한 것으로, 어람용과 예람용이 외형적으로 동일하게 제작되었음을 잘 보여준다.

 「보인소의궤」 <규 14218> 「보인소의궤」 <규 14219>

규장각 소장 「보인소의궤」의 어람용과 예람용 비교

 고종대의 예람용 의궤 제작

고종대에 예람용 의궤가 제작되기 시작한 이유는 명확하지 않다. 그런데, 고종의 왕세자인 순종은 1874년(고종 11)에 출생했으므로, 예람용 의궤 제작이 처음 시작된 1873년 당시에는 아직 왕세자가 없었다. 왕세자가 존재하지 않았던 시기에 예람용 의궤를 제작하기 시작했다는 사실은 여기에 어떤 정치적 목적이 개입되어 있음을 시사해 준다. 이와 관련되어 주목되는 것은 예람용 의궤의 제작 시점이 고종의 친정이 시작된 시기와 일치한다는 점이다. 이는 고종이 친정 개시와 함께 왕실의 위엄을 높이기 위한 방편의 하나로 예람용 의궤 제작을 추진했을 것이라는 추정을 가능하게 해 준다. 즉, 고종은 예람용 의궤 제작을 통해 왕위 계승자인 왕세자의 위상을 국왕에 준하도록 격상시킴으로써 왕실의 권위를 높이고, 이를 바탕으로 정국 운영의 주도권을 공고히 하려 했던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이렇게 볼 때, 고종 친정기에 처음 나타난 예람용 의궤의 제작은 조선시대 의궤 제작 방식의 변화라는 측면뿐만 아니라 고종대 정치사의 전개에서도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 문제였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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