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대학교 규장각 지리지 종합정보

지리지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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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지는 정사(正史)의 일부인 지(志)로 출발하여 독립된 지리지로 발전하였다. 중국에서 반고(班固)가『한서(漢書)』를 지으면서 처음으로 지리지(地理志)를 지(志)에 포함시켰다. 우리나라도 정사체로 쓰인『삼국사기』와『고려사』는 각각 지리지(地理志)를 갖추고 있다.
조선시대에 독립적인 지리지가 편찬되면서 본격적인 지리지의 시대가 열렸다. 조선시대 지리지의 역사는 15세기~16세기 중반, 16세기 후반~17세기, 18세기~19세기 중반, 19세기 후반~19세기 말의 몇 단계로 나눌 수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은 가장 많이 이용된 전국지리지이다. 신증이라는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성종 때 편찬한『동국여지승람』을 증보하여 편찬한 것이다. 세조 때부터 양성지의 주도로 전국지리지 편찬 사업이 지속되어 1481년(성종12)에 『동국여지승람』의 편찬을 일단 완료하였다. 그런데 이즈음 명나라에서『대명일통지(大明一統志)』가 간행되자 다시『대명일통지』체계에 맞추어 개편하는 작업을 수행하였다. 1487년(성종18) 마침내『동국여지승람』을 간행하였다. 이를 다시 1530년(중종 25)에 증보 간행한 것이『신증동국여지승람』이다. 목판본으로 간행된『신증동국여지승람』은 널리 유포되어 조선후기까지도 전국지리지로서 애용되었다.
16세기 후반~17세기에는 각 지역의 정체성이 형성되면서 지역의 독자적인 읍지 편찬이 나타났다. 각 지역은 조선전기 전국지리지 편찬 과정에서 읍지를 편찬하여 도(道)와 중앙정부에 올려 보내는 작업을 수행하여 읍지 편찬의 경험을 갖게 되었다. 이런 경험을 바탕으로 16세기 후반부터 독자적인 읍지 편찬이 나타났다. 읍지 편찬에 관심을 가진 사림계 인사가 고을 수령으로 부임하면서 고을의 사족과 협력하여 읍지를 편찬하는 예가 많았다. 사림의 주도 아래 지역의 통치질서를 확립하고 민생의 안정을 도모하고 자신들의 문화적 주도권을 확립하기 위해 고을의 지리지를 편찬하였다.
18세기~19세기 중반에는 조선후기 사회 변화에 발맞추어 중앙정부는 새로운 전국지리지를 편찬하려고 노력하였으며, 각 지역에서도 활발하게 읍지를 편찬하였다. 전국지리지로 여전히 16세기에 편찬된『신증동국여지승람』이 통용되었기 때문에 시대 변화에 맞는 새로운 전국지리지 편찬이 절실한 상황이었다.
하지만『여지도서』역시 간행되지 못하였기 때문에 여전히 전국지리지를 새롭게 만들어 간행할 필요가 있었다. 정조는 규장각을 중심으로 1789년(정조13)부터 전국지리지 편찬을 독려하였다. 1796년(정조20)까지『해동여지통재(海東輿地通載)』라는 이름으로 60권 분량이 편찬되었지만 완결을 이루지 못하고 정조가 사망하였다. 현재 규장각에는 1789년경에 편찬된 읍지가 다량 소장되어 있다. 항목과 서술 양식이 통일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해동여지통재(海東輿地通載)』편찬의 일환으로 작성된 읍지로 추정된다.
19세기 후반~19세기 말에는 국가적 위기에 당면하여 중앙정부는 통치 기초 데이터 수집 과 제도 개혁을 정착시키기 위해서 전국지리지를 몇 차례 편찬하였으며, 개인들도 전국지리지를 저술하여 사회적 필요에 부응하고자 하였다. 그리고 각 지역에서는 중앙 정부의 요청에 따라, 각 지역의 읍지 편찬의 전통에 따라 읍지 편찬을 지속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