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대학교 규장각 지리지 종합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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읍지속의 지도모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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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경상도읍지(규666)_함양

    규장각 소장 『慶尙道邑誌』(1832년 경, 奎 666)에 수록된 경상도 함양군 지도. 함양군은 안의면․서상면․서하면을 제외한 현재의 경상남도 함양군에 걸쳐 있었다. 현재의 남강 본류가 오른쪽 위의 濫溪 방향에서 흘러들어와 桃峴 방향으로 빠져나간다. 읍성 아래쪽의 하천이 현재의 위천이고, 그 아래쪽의 하천이 현재의 임천강이다. 임천강은 현재의 남원시 운봉읍․인월면에서 발원하여 산내면을 거쳐 왼쪽의 安國寺 부근에서 함양 땅으로 흘러들어오는데, 이 지도에서는 그런 사실을 이해하기 어렵게 그렸다. 함양군에서는 面을 里라고도 하였는데, 栢田里(자밭리)처럼 지도 위에 기록된 마을 이름 중 里가 붙은 것이 바로 面을 의미한다. 위천 북쪽에서 가장 높은 산은 현재의 백전면 우산리에 있는 읍성 왼쪽의 白雲山(1278.6m)이지만 별로 눈에 띄게 그려져 있지는 않다. 대신 함양군 전체에서 보면 그리 높지 않은 白巖山(621.4m)이 가장 크고 웅장하게 표현되어 있는데, 이는 읍치(즉 읍성)에서 북쪽으로 바라볼 때 가장 두드러진 풍수의 祖山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백암산에서 뻗어 내린 산줄기가 읍치(즉 읍성) 바로 북쪽에서 멈추며 솟아난 主山이 筆峯山(250.0m)이며, 일반적으로는 文筆峯이라 부른다. 읍성은 현재의 함양읍 시내에 있었는데, 아주 넓지는 않지만 거의 완전 평지에 들어서 있다. 이는 주산-좌청룡-우백호-안산의 풍수적 형국과 별로 관계가 없는 것으로, 함양읍성의 축조 시기가 읍치의 조영에 풍수가 거의 영향을 미치지 못하던 고려 말인 1780년(고려 우왕 6)이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풍수가 읍치의 권위를 상징하는 조선에 들어와서 주변 산세를 풍수적 인식에 입각하여 의미를 부여하게 되었고, 그 결과가 본 지도 위에 祖山으로 인식된 백암산을 특별히 두드러지게 그리게 만든 것이다. 읍성 왼쪽에는 통일신라 때 최치원이 조성했다는 上林숲이 大館林으로 기록되어 있고, 지도 오른쪽의 舊山城은 삼국시대에 축조되어 이용되다가 1380년 고려 정부군이 왜구에 의해 대패를 했던 둘레 1,218m의 테뫼식 산성이다. (이기봉)

  • 영남읍지(규12173)_함양

    규장각 소장『嶺南邑誌』(1871년, 奎 12173)에 수록된 경상도 함양군 지도. 함양군은 안의면․서상면․서하면을 제외한 현재의 경상남도 함양군에 걸쳐 있었다. 현재의 남강 본류가 오른쪽 위의 濫溪 방향에서 흘러들어와 桃峴 방향으로 빠져나간다. 읍성 아래쪽의 하천이 현재의 위천이고, 그 아래쪽의 하천이 현재의 임천강이다. 임천강은 현재의 남원시 운봉읍․인월면에서 발원하여 산내면을 거쳐 왼쪽의 安國寺 부근에서 함양 땅으로 흘러들어오는데, 이 지도에서는 그런 사실을 이해하기 어렵게 그렸다. 기호로는 큰 원과 세로로 긴 사각형을 사용하였는데, 정보 사이의 구분이 잘 되어 있지 않다. 세로로 긴 사각형 안에는 자연 지명과 인문 지명이 혼용되어 있는데, 그 중 里가 들어가 있거나 臺․川․溪․菴․倉․壇 등 지명의 종류를 알 수 없는 세 글자의 경우 面의 이름을 가리킨다. 전국적으로 面이 가장 많이 사용되었지만 坊․社․里가 사용되기도 하다. 읍성은 현재의 함양읍 시내에 있었는데, 아주 넓지는 않지만 거의 완전 평지에 들어서 있다. 이는 주산-좌청룡-우백호-안산의 풍수적 형국과 별로 관계가 없는 것으로, 함양읍성의 축조 시기가 읍치의 조영에 풍수가 거의 영향을 미치지 못하던 고려 말인 1780년(고려 우왕 6)이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풍수가 읍치의 권위를 상징하는 조선에 들어와서 주변 산세를 풍수적 인식에 입각하여 의미를 부여하게 되었고, 그 결과가 본 지도 위에 풍수적인 산줄기 형상으로 그리게 만든 것이다. 읍성 왼쪽에는 통일신라 때 최치원이 조성했다는 上林숲이 大館林으로 기록되어 있고, 지도 오른쪽의 舊山城은 삼국시대에 축조되어 이용되다가 1380년 고려 정부군이 왜구에 의해 대패를 했던 둘레 1,218m의 테뫼식 산성이다. 흥선대원군 이하응(19820-1898)은 서원의 폐단을 개혁하기 위해 47개 서원만 남겨놓고 모두 없애라는 서원철폐령을 내렸다. 함양에서는 이 고을이 출생지인 일두(一蠹) 정여창(鄭汝昌, 1450~1504)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창건하여 위패를 모신 濫溪書院만이 47개 중의 하나에 속했다. 나머지 4개의 서원에는 ‘헐어서 없애버렸다’는 뜻의 毁撤이란 문구가 적혀 있다. 함양군의 里 즉 面 이름의 대다수가 순우리말 이름에 대해 한자의 뜻과 소리를 따서 표기한 것인데, 그 중 현재까지 알 수 있는 사례를 들면 栢田里(자밭리)․柳等里(버드리)․栢吐里(잣들)․毛看里(모가이) 등이 있다.

  • 해동지도(고대4709-41)_함양군

    함양군은 1729년(영조 5)에 府로 승격되고, 1788년(정조 12)에 도로 郡으로 강등되기까지 함양부이었다. 함양군은 지금의 경상남도 함양군 함양읍, 백전면, 병곡면, 수동면, 유림면, 지곡면, 휴천면을 포함하는 지역이었고, 읍치는 함양읍상리 일대에 있었다. 지도에서도 확인할 수 있는 바와 같이 함양군은 사방 산으로 둘러싸인 분지이다. 고을 북쪽에 위치한 白巖山이 鎭山이다. 지도에 栢淵書院, 洲書院, 溪書院이 나타나 있는데, 당주서원과 남계서원은 사액서원이고, 백연서원은 사액을 받지 못한 서원이다. 남계서원은 1552(명종 7)에 세워져 정여창, 강 익, 정 온, 유호인을 배향하였던 서원이다. 당주서원은 1581년(선조 14)에 세워져 1660년(현종 1)에 사액되었다. 백연서원은 1670년(현종 11)에 세워져 최치원과 김종직을 배향하였던 서원이다. 君子寺는 현재 절터만 남아 있다. 세간에 전해오는 바에 따르면 진평왕이 어렸을 때 그 숙부 진지왕을 피하여 이 곳에서 살다가 왕위에 오르게 되었다고 한다. 읍치 북쪽 백전면에 위치한 靈隱寺는 절터만 있고, 부근에 영은사 부도가 남아 있다. 읍치 우측에 보이는 사근역은 찰방역으로서 속역 14개를 거느리고 있었다.(金在完)

  • 1872년지방지도(규10512)_함양군지도

    함양군지지도 咸陽郡之地圖, 함양군은 지금의 경남 함양군 함양읍, 백전면, 병곡면, 지곡면, 소동면, 유림면, 휴천면, 마천면 일대로 읍치는 함양읍 상리 일원에 있었다. 八良嶺을 사이에 두고 전라도 운봉현과 접하고 있다. 산지의 표현은 峰巒을 연결시켜 그려 맥세를 강조하였다. 읍치는 크게 그려 부각시키지 않고 주변 지역과 비슷한 비율로 그렸다. 원래 읍치는 동쪽에 있었으나 왜구의 침입으로 관아가 불에 타버리자 1380년 文筆峯 아래로 옮기고 토성을 쌓았다. 이후 1729년(영조 5) 府使 金洗가 석성으로 수축하였다. 주변의 각면에는 소속 동리도 비교적 상세히 표시하였다. 당시 각 면별로 설치되는 社倉을 비롯하여 義倉, 任倉, 德倉, 東倉, 西倉, 南倉 등의 창고도 해당 위치에 기재되어 있다. 찰방역인 沙近道가 있었던 사근면에는 古山城이 성첩 모습으로 그려져 있다. 이 산성은 1400년 監務 張?哲이 성을 제대로 지키지 않아 왜구에 의해 함락된 이후 거의 피폐해졌는데, 성종 때 다시 수축했다. 그러나 이 시기에 이르러서는 관리가 안되어 산성으로서의 기능이 상실되었다. 이 지역도 읍내장을 비롯하여 沙近場, 玉女場, 介坪場 등의 정기시가 개시되어 있다. 읍치 동쪽 ?溪에는 1552년(명종 7)에 姜翼이 창건한 ?溪書院이 훼철되지 않고 남아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

  • 대동여지도_18첩3면

    지도 위의 지역은 현재의 경상남도 의령군, 진주시, 산청군, 합천군, 하동군, 함양군 일대에 걸쳐 있다. 왼쪽 위쪽에서 발원하여 오른쪽 아래로 빠져나가는 하천이 낙동강의 지류 중 가장 큰 남강이다. 왼쪽 아래에 일부 보이는 하천은 섬진강이다. 남강에서는 갈수기에는 의령 부근의 鼎岩까지, 증수기에는 晋州 읍치 부근까지 배가 운행되며 많은 물자의 장거리 운송을 담당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진주 읍치 아래쪽의 남강 변에는 晋江이란 명칭이 적혀 있는데, 전통시대에는 남강의 구간마다 다양한 명칭이 사용되었다. 그 오른쪽에는 江倉이 표시되어 있다. 조선 후기에 대동법의 시행 이후 여러 고을의 조세를 한 곳에 모아 한양으로 운반하던 漕倉 제도가 약화 폐지되었다. 이에 따라 해안이나 강가의 각 고을은 스스로 大同米와 田稅를 모아 한양으로 운반하게 되었는데, 이를 위해 만들어진 창고가 海倉 또는 江倉이다. 지도 왼쪽에 웅장하게 그려진 天王峯은 백두산에서 시작된 백두대간이 끝나는 지리산이다. 《대동여지도》에서 웅장하게 그려진 산의 모습은 대부분 기존의 지리지 내용과 부합된다. 지리산에서 남동쪽으로 뻗은 산줄기는 남해안을 따라 김해까지 가는 낙남정맥이었다. 洛南正脈이란 낙동강 남쪽에 있는 산줄기란 의미이다. 지도에도 잘 그려져 있듯이 晋州의 영역은 지리산에까지 뻗어있을 정도로 넓었다. 현재는 지리산과 인접한 지역이 대부분 산청군으로 편입되어 있다. 진주의 영역이 넓었던 이유는 고려시대까지 지방관이 파견되지 않은 여러 屬縣을 거느린 主縣이었기 때문이다. 지도에도 지리산 방면으로 薩川, 屈村 등의 古縣이 표시되어 있다. 이들 고현은 조선 초기까지 지방관이 파견되지 않아 독자성을 상실하고 진주에 통폐합되었다. (이기봉)

  • 영남읍지(규12174)_함양

    규장각 소장『嶺南邑誌』(1895년, 奎 12174)에 수록된 경상도 함양군 지도. 함양군은 안의면․서상면․서하면을 제외한 현재의 경상남도 함양군에 걸쳐 있었다. 읍성은 현재의 함양읍 시내에 있었는데, 아주 넓지는 않지만 거의 완전 평지에 들어서 있다. 이는 주산-좌청룡-우백호-안산의 풍수적 형국과 별로 관계가 없는 것으로, 함양읍성의 축조 시기가 읍치의 조영에 풍수가 거의 영향을 미치지 못하던 고려 말인 1380년(고려 우왕 6)이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풍수가 읍치의 권위를 상징하는 조선에 들어와서 주변 산세를 풍수적 인식에 입각하여 의미를 부여하게 되었다. 그 결과 첫째, 天王峰-白岩山을 거쳐 읍치 북쪽의 주산인 筆峰山까지 이어진 산줄기를 강조하였고, 둘째, 고을 전체가 마치 산줄기로 둘러싸인 것처럼 표현하여 오른쪽의 남강 본류와 아래쪽의 임천강이 다른 지역에서 흘러들어온다는 사실을 이해하기 어렵게 그렸다. 읍성 왼쪽에는 통일신라 때 이 고을의 太守를 지낸 최치원이 조성했다는 上林숲이 大館林으로, 최치원을 기리는 學士樓가 표시되어 있다. 흥선대원군 이하응(19820-1898)은 서원의 폐단을 개혁하기 위해 47개 서원만 남겨놓고 모두 없애라는 서원철폐령을 내렸다. 함양에서는 이 고을이 출생지인 일두(一蠹) 정여창(鄭汝昌, 1450~1504)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창건하여 위패를 모신 濫溪書院만이 47개 중의 하나에 속했다. 나머지 5개의 서원은 헐려서 없어졌는데 이 지도에는 그런 사실이 담겨 있지 않다. 함양군 面 이름의 대다수가 순우리말 이름에 대해 한자의 뜻과 소리를 따서 표기한 것이다. 그 중 현재까지 알 수 있는 사례를 들면 栢田面에서의 栢田은 순우리말 자밭에 대해, 柳等面에서의 柳等은 버드리에 대해, 栢吐面에서의 栢吐는 잣들에 대해, 毛看面에서의 毛看은 모가이에 대해 한자의 뜻과 소리를 따서 표기한 것이다. (이기봉)

  • 함양군읍지(규10862)

    1899년에 편찬된 경상남도 『咸陽郡邑誌』 〈奎 10862〉에 수록된 지도. 북쪽을 위로 그렸고, 동서로 길게 배치한 회화식 지도이다. 지도 중앙에 읍기(邑基)를 표현하고, 백암산(白巖山), 천왕봉(天王峰), 지리산(智異山) 등 함양군에 소재한 산과 봉우리들을 곳곳에 그려 넣었다. 향교(鄕校)와 산성(山城), 사직당(社稷堂)은 강조하여 표현하였다. 남계서원(濫溪書院), 도곡서원(道谷書院), 사마재(司馬齋), 송호서원(松湖書院), 당주서원(溏洲書院), 구천서원(龜川書院) 등 학교 시설의 위치를 표시하였다. 학사루(學士樓), 문수사(文殊寺), 신남창(新南倉), 사근교(沙斤橋) 등 누정, 사찰, 창고, 교량 등 고을 내 주요 시설에 대해서도 상세히 표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