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대학교 규장각 지리지 종합정보

지리지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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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세기 후반의 지리지 편찬

역사의 한 장면, 역사의 장소
 ‘19세기 후반 조선은 어떤 모습이었을까? 각 고을의 읍치가 위치했던 곳은 어디이며, 가장 많은 사람이 살았던 고을은 어디일까? 내비게이션이 없었던 그 시기에 사람들은 지방에서 서울까지 어떻게 찾아갔을까? 각 고을의 특징은 무엇이며, 특산물은 무엇일까? 고지도에 표시된 사찰의 정확한 위치는 어디일까? 춘향전의 배경인 광한루는 남원 어디에 위치해 있을까?


 우리 역사에 관심이 있는 이라면
, 요즘 유행하는 사극을 즐겨 보는 이라면 한 번쯤은 이와 같은 질문을 던지고 그 답을 찾으려고 노력해 보았을 것이다. 물론 오늘날 이와 같은 질문은 인터넷에서 남원 광한루를 검색하고, 위성지도를 통해 그 일대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오늘날의 모습을 확인하는 것일 뿐, 사극에서 그려지는 또는 역사의 흔적을 찾아보는 데는 한계가 있다. 그래서 우리는 역사의 한 장면, 역사의 장소를 찾기 위해 조선 시대에 제작된 지도와 지리지를 함께 책상 위에 펼쳐놓게 된다.

대동여지도(大東輿地圖)대동지지(大東地志)
 ‘조선 시대지도’, 이 두 단어를 조합 할 때 가장 먼저 떠오르는 단어는 대동여지도(大東輿地圖)이다. 22층으로 구성된 대동여지도의 각 지도를 펼쳐 연결하면 남북으로 세로 6.8m, 가로 4.0m의 거대한 우리나라 전도가 된다. 이를 통해 우리는 조선 후기 조선의 모습과 각 고을 읍치의 위치를 확인할 수 있다. 그리고 서울에서 전국 각지로 뻗어 나간 도로망과 도로 위 10리마다 찍혀 있는 점을 통해 그 시기 지방에서 서울까지의 여정을 상상해 볼 수도 있다. 그러나 대동여지도남원(184) 부분에서 광한루를 찾을 수는 없고, 남원에 사는 인구수, 또는 특산물을 확인할 길도 없다. 지도에서 찾지 못한 이와 같은 정보를 확인할 수 있는 자료가 바로 지리지이다. 대동여지도와 함께 대동지지(大東地志)를 펼쳐 놓으면 남원부의 위치뿐만 아니라, ‘광한루는 부의 남쪽 2()쯤 자리 잡고 있으며, 오미자·석류·은어 등이 이곳의 특산물임을 알 수 있다. 이처럼 지리지는 오늘날 인터넷에서 남원을 검색하면 찾아 볼 수 있는 그 지역의 백과사전과 유사한 것이다. 백과사전의 내용을 살펴보면 남원의 위치·연혁·산업·교통·사회문화 등이 정리되어 있는데, 지리지의 내용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다. 다만 제작 시기와 제작 목적에 따라 다소 차이가 있을 뿐이다.


대동여지도(大東輿地圖)남원(184)


대동지지(大東地志)<4790-37> 남원(76)

고산자 김정호
 조선 후기 전국지리지는 대동여지도를 제작한 고산자 김정호의 지리지 저술로 대표된다. 1834년 전국지도인 청구도(靑邱圖)를 제작한 김정호는 헌종~철종대에 동여도지(東輿圖志)를 편찬하고, 동여도지를 기초로 대동여지도를 판각하였다. 1861(철종 12) 대동여지도를 완성한 후 동여도지를 기초로 새로운 지리지 편찬을 시도하였고, 그 결과물이 바로 대동지지이다. 3215책으로 구성된 대동지지는 현재 1866(고종 3)까지 추보(追補)하다가 미완으로 끝난 책이라는 점에 의견이 모이고 있다. 필사본인 대동지지는 현재 고려대학교 도서관과 국립중앙도서관에 소장되어 있으며,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에 소장되어 있는 대동지지1932년에 다시 필사된 것이다
.

지역지리학과 계통지리학의 결합
 『대동지지의 체제는 이전의 전국지리지나 지리지와 달리 독특한 구성 방식으로 제작되었다. 각 지역 단위로 지역의 성격을 기술하는 지역별 지리지와 강역·도로·국방·산천 등 자연환경과 주제별 지리학을 결합한 형태로, 이는 조선 후기 실학적 지리학의 연구 성과를 지리지에 종합하여 집대성한 시도이자 결과물이다. , 현대지리학적인 측면에서 보자면 대동지지는 지역지리학의 연구 방법과 계통지리학적인 연구 방법을 결합한 지리지로, 우리 국토를 보다 정확하게 설명하고 있다. 그리고 세종실록지리지나 조선 후기의 일반적인 지리지들과는 차이점이 있다. 첫째,세종실록지리지에 강조되었던 인물·성씨·시문에 관련된 항목들과 내용이 제외되었고, 둘째, 반대로 세종실록지리지에서 약화하였던 군사적인 측면이대동지지에는 강조되었다. ‘전고(典故)’라는 조항을 따로 설정하여 외국의 침략과 그 지역에서 일어났던 역대 전투를 상세하게 기록하였고, ‘문목(門目)’조에 산수·성지·영아(營衙진보·봉수·창고·진도(津渡목장 등의 조항도 국가의 방어와 관련된 것으로 설명하였다. 그리고 셋째,대동지지에는 내용을 기술함에서 철저한 사실성과 고증을 기초로 하기 위한 노력이 반영되어 있으며, 동시에 계속된 보완을 통해 지역의 변화상을 반영하고자 하는 노력이 반영되어 있다.

대동지지의 내용 구성
 『대동지지의 내용 구성은 총괄·팔도지지(八道地志산수고(山水考변방고(邊坊考정리고(程里考역대지(歷代志)’ 등의 여섯 부분으로 되어 있다. 총괄 부분은 전체 목차인 총목과 이 지리지의 편집 원칙이 될 항목을 풀이한 문목, 그리고 인용 서목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팔도지지 부분은 총 24권으로 권1이 경도(京都) 및 한성부(漢城府), 24가 경기도, 5·6이 충청도, 710이 경상도, 1114가 전라도, 15·16이 강원도, 17·18이 황해도, 19·20이 함경도, 2124가 평안도 순으로 기술되어 있다. 그 내용을 살펴보면, 경도에서는 국조기년(國朝紀年도성(都城궁궐(宮闕제궁(諸宮단유(壇壝묘전(廟殿묘정배향제신(廟庭配享諸臣진전(眞殿궁묘(宮廟동반부서(東班府署서반부서(西班府署) 등이, 한성부에는 연혁(沿革고읍(古邑방리(坊里호구(戶口산수(山水강역(疆域형승(形勝성지(城池영아(營衙봉수(烽燧역참(驛站진도(津渡교량(橋梁토산(土産시전(市廛궁실(宮室누정(樓亭단유·묘전·침묘(寢墓사우(祠宇전고(典故)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리고 권25·26은 산수고와 변방고, 27·28은 정리고이다. 정리고란 오늘날 도로 지도를 글로 풀어 정리한 것으로, 조선의 모든 도로망인 간선(幹線)과 지선(支線)을 포함한 육로(陸路)와 수로(水路), 그리고 중국·일본·유구(琉球)로 통하는 육로 및 수로에 대하여 통과 지점과 그 거리가 기록되어 있다. 하지만 현재 이 두 권은 결질(缺帙)로 전하여지고 있다. 28 발참(撥站)에는 조선 시대에 말을 타고 공문 및 군사정보를 연락하던 통신수단이었던 서북쪽 의주대로의 기발, 동북쪽 경흥대로의 보발, 동남쪽 동래대로의 보발이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경도에서 충청·전라·경상도 연해를 돌아 동래까지의 해로와 경도에서 황해·평안도 연해를 거쳐 의주에 이르는 해로, 함경도 경흥에서 시작하여 강원도·경상도 연해를 거쳐 동래에 이르는 해로, 그리고 제주 해로의 통과 지점을 기술한 연변해로(沿邊海路)도 포함되어 있다. 29~32는 방여총지(方輿總志) 부분으로, 단군조선에서부터 고려 시대까지의 모습을 기록하고 있다
.

김정호의 시각
 총 32권으로 구성된 대동지지는 김정호 일생의 집념과 노력이 결집된 지리지로, 그 안에는 조선 지리에 관한 내용과 함께 그의 자세와 의식이 투영되어 있다. 첫째, 대동지지에는 저자 자신의 독자적인 견해를 정리하였다.동여도지의 형승(形勝)조는여지승람이나 기타 문헌에서 광범위하게 수집한 자료를 정리한 것이 많았지만, 대동지지에서는 자신이 파악한 지역의 특성으로 대치하였고 자신의 견해가 불확실한 지역에 대해서는 그 내용을 생략하였다. 이러한 측면은 연혁·고읍·전고 등 이설이 많은 역사적 장소에서 더 뚜렷이 나타난다. 둘째, 종합적 시각으로 지역의 특성을 반영하고자 했던 김정호의 시선이 지리지에 그대로 반영되었다. 대동지지동여도지의 수록된 항목 수를 비교해보면,동여도지에 비해 대동지지의 항목 수가 줄어들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는 이전 지리지에 수록되어 있던 항목과 그 내용을 탈락시킨 것이 아니라 항목들을 통합하여 종합화를 시도한 것이다. 예로 동여도지에 개별 항목이었던 산총(山總수총(水總영로(嶺路강역(疆域)’대동지지에서 산수(山水)’로 통합되었고, 산수에는 사찰·고적 등의 내용도 포함하고 있다. 이러한 변화는 항목을 보다 체계적으로 조정하고, 이를 통해 지역의 종합적 특성을 전달하려는 목적에서 비롯된 것이다. 셋째, 고을의 위치변화와 지명 변천을 기록하는 과정에서 김정호는 과학적 사고와 사실성에 기초하기 위해 노력했으며, 이는 산천의 모습을 파악하고 묘사하는 과정에도 그대로 반영되었다. 이와 같은 내용과 노력으로 제작된 대동지지대동여지도와 함께 19세기 조선의 국토상, 즉 각 지역의 모습을 재현할 수 있는 바탕이자 복원할 수 있는 풍부한 자료집이다.

19
세기 후반 지리지
 19세기 후반은 김정호 개인이 제작한 대동지지뿐만 아니라 중앙 정부에서도 많은 지리지를 편찬한 시기이다. 중앙에서 지리지를 많이 편찬하였다는 것은 곧 새로운 지리지가 필요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고종 시대 지리지는 크게 1871, 1895, 그리고 1899년 세 차례에 걸쳐 편찬되었다. 그렇다면 이 시기 왜 조선에서는 새로운 지리지가 필요했을까


 새로운 지리지가 왜 필요했는지는 지리지가 제작된 시기에 조선사회의 변화나 사건을 통해
, 그리고 지리지에 추가된 내용 또는 강조된 내용을 통해 확인 할 수 있다. 규장각한국학연구원에 소장되어 있는 영남읍지(12173)17·호남읍지(12175)10·호서읍지(12176)17·해서읍지(12171)17책 등은 고종 시대에 제작된 지리지 가운데 가장 이른 시기인 1871년에 제작된 지리지이다. 1871년은 1866년의 병인양요와 1871년에 있었던 신미양요 때문에 조선의 군사적 강화가 요구되었던 시기이다. 또한, 서양의 침략에 적극적인 대응을 하기 위해 국방과 치안을 위한 관제 개편, 군제의 개편, 군사시설의 확충과 경비의 강화, 군수품의 정비와 실험 등을 시도하였다. 그리고 이와 같은 정책을 추진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각 지방의 실정 파악이 우선이었다. 따라서 이 지리지의 제작은 그와 같은 맥락에서 생각할 수 있다. 또한, 이 시기 지리지의 내용을 살펴보면 읍의 재정에 해당하는 예산계획서와 지출명세서의 성격을 가지는 항목인 읍사례(邑事例)’가 강화되어 추가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는 각 지방에 대한 효율적인 관리와 중앙정부의 영향력을 좀 더 강화하는 데 필요한 자료였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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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1호남읍지<12175>장성부읍지(長成府邑誌)사례(事例)’

1871년 전국 읍지
 1871년 전국을 대상으로 지리지가 편찬되었고, 이듬해인 1872년 지리지에 이어 전국적인 차원의 지도제작 사업이 추진되었다. 그 결과 조선 시대 관찬지도 제작 사업의 마지막 성과로 평가되는 1872년 지방지도가 8도에서 제작되었고, 현재 총 459장 지도가 규장각한국학연구원에 소장되어 있다. 각 도의 군현 지도는 물론 영(진영(鎭堡목장(牧場산성(山城) 등을 그린 지도까지 포함하고 있다. 각 도에서 제작되었기 때문에 지도의 형식면에서 통일성은 갖추지 못하였지만, 지도가 담고 있는 지리적 정보는 현재 남아 있는 다른 군현 지도와 비교해 볼 때 매우 상세한 편이다. 또한, 지도의 형식과 더불어 크기 역시 각 군현의 크기 또는 역할이나 중요도에 따라 다소 차이가 있다.


1872년 지방지도장성부 지도

1895년 전국 읍지
 1871년 지리지가 군사적인 목적이 강조되어 있다면, 1895년에 제작된 지리지는 재정적인 면이 더 강화되었다고 해석되고 있다. 1895년은 1894년 갑오개혁의 일환으로 1413년 이래 지속되었던 조선의 8() 행정구역이 23337군으로 바뀐 해이다. 행정구역 개편에 앞서 1894년 전국에 내려진 전국읍지상송령(全國邑誌上送令)’에 의해 다시 한 번 전국지리지가 제작되었다. 이는 새로운 행정구역을 개편하는 자료인 동시에 새로운 행정체제에 맞춰 각 지방을 파악하는 자료로 사용하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 이 시기에 제작된 지리지는 바뀐 행정구역 개편을 반영했다기보다는 행정구역개편을 시행하기 위한 자료이자, 새로운 행정체제 강화를 위한 자료였다. 그러나 이 행정체계는 시행된 지 불과 1년 만에 폐지되었으며, 1896년 을미개혁의 하나로 또다시 새로운 행정구역개편이 이루어졌다. 23부 체제가 13도 체제로 바뀌었다.고창군읍지(10773)의 건치연혁 항목을 보면 개국504(開國五百四年) 을미(乙未, 1895)’에 군수(郡守)로 고쳤다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고창은 조선후기까지 지속적으로 현()이었는데, 이 지리지의 표지에는 고창군(高敞郡)’이라고 적혀 있다. 이와 같은 지방제도 개혁 후 모습을 반영하고 있는 지리지가 1899년에 제작된 지리지이다. 그리고곡성군읍지(10785)에서는 조적(糶糴) 마지막 부분에 병신작사환미(丙申作社還米)’라는 문구가 있는데, 여기서 병신년은 1896(건양 1)으로, 통계자료가 곡성의 1895년 전후 사정을 반영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1899년 편찬된고창군읍지(高敞郡邑誌)<10773>


1899년 편찬된곡성군읍지(谷城郡邑誌)<10785>

현재 1895년 상송령에 의해 제작된 호서읍지<12308>1·관북읍지<12179)7·관서역지(關西驛誌, 12193)2·관서읍지(12169)26·관서진지(12192)2·기전영지(畿甸營誌, 12187)3·영남영지(12184)2·영남읍지(12174)34·영남진지(12183)3·호남역지(12190)1·호남영지(12189)1·호남진지(12188)3·호남읍지(12176)7책 등이 규장각한국학연구원에 소장되어 있다. 그리고 가산군읍지(10940)를 포함하여 1899년에 제작된 99종의 지리지는 규장각한국학연구원과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에 소장되어 있다.

필자: 양윤정(SRG컨설팅 부설연구소 실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