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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국영

강석화(경인교육대학교 사회교육과 교수)

어려운 시기의 충신


“만약 경이 없었다면 어찌 나에게 오늘이 있었겠는가.”


『명의록明義錄』(古 4250-70)
『명의록明義錄』(古 4250-70).
왕세손王世孫[정조]의 대리청정代理聽政을 반대한 홍인한洪麟漢, 정후겸鄭厚謙 등을 치죄治罪, 사사賜死하고, 세손을 옹위한 홍국영洪國榮, 정민시鄭民始, 서명선徐命善의 충절을 선양, 중용한 후 충역忠逆을 밝히고자 간행된 책.


    1777년(정조 1) 3월 29일, 세손 시절부터 정조를 괴롭히던 외척 세력들을 제거하고 그 전말과 유공자들을 기록한 『명의록』을 완성하고 경축하면서 정조가 승지 홍국영에게 한 말이다. 홍국영은 1772년(영조 48) 9월부터 1779년(정조 3) 9월까지 관직에 있는 동안 세손이었던 정조를 보좌하여 궁궐 내외의 모든 난관을 이길 수 있도록 하였고 정조가 임금으로 즉위한 후에는 초기의 왕권 확보를 위해 누구보다도 공을 세운 인물이었다. 정조는 자신의 권력 기반을 강화하고 정국을 주도하기 위해 즉위 직후부터 외척 세력 척결과 친위 군사기구 설치, 규장각 설립 등을 최우선 목표로 추진하였다. 홍국영은 정조의 정책을 가장 앞장서서 실행에 옮겼고 정조는 그의 공로를 높이 평가하여 위와 같이 말했던 것이다.
    지금까지 홍국영이 정조 치세 초년에 외척세력 척결에 앞장섰으며 숙위소를 설치・운영하는 등 친위 군사기구를 주도하였던 사실은 널리 알려져 있다. 그러나 정조가 관심을 가졌던 규장각과 홍국영의 관련성에 대해서는 거의 규명되어 있지 않다. 실록에는 홍국영이 규장각 직제학과 제학으로 임명되었던 일 정도만 기록되어 있을 뿐이다. 하지만, 『일성록』 등 다른 자료의 내용을 검토하면 홍국영은 규장각의 설치, 책임자 인선, 체제 정비 등 모든 과정에 깊이 개입하였으며 초창기 규장각 제도 마련에 가장 핵심적인 역할을 한 인물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이제 지금까지 알려진 홍국영의 이력과 정조 초반의 정치적 역할, 정계 은퇴 및 사망에 이르기까지 그의 생애에 대해 간략히 살펴보고 크게 부각되지 않았던 홍국영과 규장각의 관계에 대해 알아보려 한다. 홍국영의 생애와 정치적 역할 등에 대해서는 박광용, 「인물평전 - 사극 ‘왕도’에서 왜곡된 홍국영의 참모습」(『역사비평』 15, 1991)과 김준혁, 「정조대 장용위 설치의 정치적 추이」(『사학연구』 78, 2005)의 내용을 중심으로 정리하였다. 가계와 생애, 권력 장악 과정 및 주요 활동, 몰락 이유 등은 박광용의 글을 주로 참고하였으며, 친위군사기구인 숙위소 관련 부분은 김준혁의 글이 도움이 되었다. 세부적인 주석은 생략하였다.

벌열가문 출신의 재주꾼

    1748년(영조 2)에 태어난 홍국영의 본관은 풍산豊山이며, 자는 덕로德老였다. 천성적으로 눈치가 빠르고 행동이 민첩하였으며 재기발랄하고 임기응변에 능하였다고 한다. 잘 생기고 매력적인 외모에 문장에도 재주가 있어 시나 글을 지을 때면 물 흐르듯 줄줄 흘러나왔다고 한다. 성격이 방탕하고 정신없이 분망하며 술과 여색을 좋아하였고 사람들과 어울려 놀고 수다 떨기를 좋아하였다는 평도 있다. 차분히 앉아서 경전 공부에 주력하기 보다는 밖에서 놀기를 좋아하는 한량배였다는 것이다. 어려서부터 주변 사람들에게 자신이 천하를 호령할 것이라 큰소리쳤으며, 무뢰배나 시정잡배들과도 잘 어울렸다고 한다. 이는 실무 지식 능력을 가진 중간 계층이나 무예에 능한 이들, 양반이지만 성리학 이외의 다양한 사상에 관심을 가졌던 인물들과 친하게 지내 교유관계의 폭이 넓었다는 뜻이다. 홍국영에 대한 인물평은 대부분 그가 몰락한 이후에 쓰인 것이므로 긍정적인 내용이 드물다. 대체적으로 보아 기존의 도덕관념이나 성리학적 가치관과는 차이가 있는, 보다 자유롭게 사고하며 행동하였던 미남형의 재기 넘치는 인물이었음을 알 수 있다.
    홍국영은 영안위 홍주원洪柱元의 6대손이다. 홍주원은 선조와 인목대비 사이에서 낳은 정명공주의 부군이며 이후 풍산 홍씨 집안은 서울에 뿌리내린 유서 깊은 벌열가문으로 인정되었다. 홍국영은 영조의 계비 정순왕후 경주 김씨 집안과도 인척 관계였으며, 사도세자의 장인 홍봉한과 그의 이복동생 홍인한은 홍국영의 10촌 할아버지 항렬이었다. 영조와 정순왕후, 혜경궁 등 왕실 및 외척의 핵심 가문과 모두 혈연으로 연결되어 있었다. 특히 영조는 홍국영을 아주 아끼고 믿어서 그가 1772년(영조 48)에 25세의 나이로 과거에 급제하자 곧바로 예문관 관직을 주어 사관史官에 임명하였고 ‘나의 손자’라고 하면서 오랫동안 측근에 두었다. 이후 홍국영은 예문관원의 겸직으로 동궁을 보좌하는 춘방 사서가 되었고 자연스럽게 왕세손[정조]과 가깝게 되었다. 홍국영은 이와 같이 왕실 및 외척과 친밀한 좋은 집안 출신으로 쉽게 출세의 지름길에 들어섰던 것이다.
    왕세손을 모시게 된 홍국영은 본인이 벌열가문 출신임에도 불구하고 정조를 도와 세손의 지위를 동요시키려는 외척벌열가문들의 책동을 저지하는데 주력하였다. 영조 치세 말년에는 정순왕후 경주 김씨 집안과 혜경궁 풍산 홍씨 집안이 서로 대립하고 있었다. 이들은 세손을 보호하기 위해서는 자신들이 정국을 이끌어야 한다는 명분을 내세우면서 세손의 동정을 염탐하였고 세손이 궁 밖으로 몰래 나갔다거나 나쁜 책을 읽는다는 등 유언비어를 퍼뜨리거나 익명 투서를 하였다. 또 세손의 지위를 동요시키기 위해 먼저 측근인 홍국영을 없애려 하였으나 홍국영은 특정 당파와 무관하게 정조를 끝까지 지켰다.
    영조가 대리청정을 명하자 세손을 모략하려는 움직임은 더욱 커졌고 홍인한을 비롯한 이들이 이를 번복하려 획책하였다. 그러나 소론계 서명선이 이를 성토하는 상소를 올렸고 영조가 이를 받아들여 세손의 대리청정은 유지되었다. 대리청정 3개월만인 1776년 3월에 정조가 왕위에 오르자 모든 상황이 변하였다.

권력의 최정점에

    즉위 직후 정조는 자신과 홍국영을 꺼리거나 제거하려 했던 세력들을 모두 처단하고 홍국영을 승지로 임명하였다. 정조는 자신의 즉위와 외척 세력 제거에 공이 컸던 홍국영, 김종수, 서명선, 정민시 등과 함께 동덕회同德會라는 모임을 만들어 이들의 공로를 치하하였다. 특히 홍국영에 대해서는 자신이 어려운 처지에 있을 때 보호해 준 의리의 주인이라고 언명하였고, 홍국영은 물러날 때까지 승지의 지위를 유지하면서 최측근으로 활동하였다.
    홍국영은 정조를 세손 때부터 보좌하면서 긴밀한 관계를 맺었지만 어려운 시기를 같이 넘겼다는 이유만으로 정조가 그를 신임하고 의지하였던 것만은 아니었다. 그는 여항의 사람들과 어울리면서 얻은 여러 가지 정보와 세상의 모든 일들을 정조에게 상세히 전해주는 역할을 맡았다. 궁중에만 있을 수밖에 없었던 정조는 홍국영을 통해 바깥세상의 일과 사람들의 동정을 알 수 있었다. 자신의 입장에 맞도록 가감한 부분이 분명히 있었겠으나 홍국영은 다른 정치 세력의 인물들이나 고답적인 학자들과는 달리 세상의 일들을 꾸밈없이 있는 그대로 정조에게 전해주었다. 정조에게는 세상 돌아가는 일상적인 일들과 사람들에 대한 시야를 제대로 갖게 하고 핵심을 들여다 볼 수 있는 안목을 높여주는 중요한 체험이었다. 홍국영을 통해 얻은 안목과 정보가 큰 자산이 되어 후일 정조는 백성들의 뜻을 이해하고 받아들이려 노력하였던 임금이 될 수 있었다.
    정조와 홍국영은 홍인한과 정후겸 세력을 먼저 제거하고, 정조의 외조부인 홍봉한을 정치 일선에서 물러나게 하였다. 다음으로는 왕대비 정순왕후의 오빠 김귀주 세력을 몰아내었다. 즉위 전부터 외척의 정치 간여에 시달렸기 때문에 정국 안정을 위해 우선 외척을 제거하려 하였던 정조의 의중을 홍국영이 이미 알고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또 정조는 홍국영에게 수어사, 총융사, 금위대장 등 군영대장직을 순차적으로 거치게 하고 병조와 도총부가 가지고 있던 궐내 순검 및 적간 임무를 금위대장에게 주었다. 곧이어 1777년(정조 1) 11월에는 건양문 동쪽에 숙위소를 설치하고 궁성 안팎의 숙위 군사 통제 및 궁궐 내외의 모든 군무를 홍국영에게 보고하도록 하였다.
    국왕의 최측근으로 정책 결정 및 집행의 책임자이며 군권까지 장악한 홍국영은 스스로 노론세력의 중심인물이 되려 하였다. 먼저, 노론의 영수 송시열을 효종의 묘정에 추가로 배향하였고 신임의리를 재천명하여 노론의 입장이 정통임을 내세웠다. 송시열의 후손 송덕상을 산림으로 불러 자기를 지지하게 한 것도 그 일환이었다. 반면 송시열과 대립하였던 윤선거와 윤증 부자의 관작을 추탈하여 소론계의 입지를 축소시켰다. 소론이 독립된 정파로 위상을 확보하지 못하게 하려는 것이었다. 아울러 홍국영은 자신이 외척이 되려 하였다. 1778년(정조 2)까지 정조의 소생이 없다는 이유를 들어 자신의 누이동생을 측실로 들이면서 원빈元嬪이라는 작호를 내리게 하였다. 조정에서는 물론 궁궐 안에서도 왕을 보필한다는 명분을 내세웠으나 원빈이라는 명호에서도 보이듯이 왕위 계승 문제를 염두에 두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왕권에 간섭할 가능성이 있는 외척세력을 몰아내었던 홍국영이 스스로 외척이 되고자 한 것이다.
    홍국영이 이처럼 궁중과 조정을 아우르는 막강한 권력을 가지게 되자 궁궐에 들르는 사람들은 누구나 먼저 홍국영을 찾아보아야 했고, 그가 퇴궐하여 집에 돌아가면 손님들이 꽉 차서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고 한다. 은퇴할 때의 회고담이지만, 자신이 “국가 일을 담당하는 동안 조정의 명령이 대부분 제 손에서 나왔습니다.”라는 회상은 빈 말이 아니었다.

홍국영과 규장각

    정조는 즉위한 해 9월에 창덕궁 금원의 북쪽에 규장각을 세우고 제학, 직제학, 직각, 대교 등 관직을 설치하였다. 이때 홍국영은 직제학으로 보임되었다. 당시 제학은 황경원과 이복원이었으며, 이들은 문형과 양관 제학으로 의망된 이들 중에서 선임된 것이었다. 직제학은 홍국영과 유언호였는데 부제학 의망인 중에서 뽑혔다. 이후 홍국영은 승정원 승지와 규장각 직제학을 겸하면서 관리 인선과 절목 마련, 도서 정리 등 모든 일을 도맡아 처리하였다. 홍국영은 서명응이 박학하므로 규장각을 맡기면 문화 진작과 성학 보필에 큰 도움이 될 것이라는 이유를 들어 제학으로 추천하였으며, 규장각 관원의 포폄안은 예조를 거치지 않고 곧바로 승정원에 보내 국왕에게 직보되도록 제도를 정비하였다.
    정조는 1778년(정조 2)에 홍국영을 규장각 제학으로 임명하면서 규장각에 관련된 모든 일들을 주관하라고 특별히 지시하였다. 이미 규장각의 실질적인 책임자로 활동하고 있던 그의 지위를 확고히 인정한 것이다. 그러나 정조와 홍국영이 모든 사안에 대해 의견이 일치했던 것은 아니었다.
    특히 규장각의 운영 경비 마련을 위한 방안을 두고 정조와 홍국영은 여러 차례 의견 대립을 보였다. 1777년(정조 1) 8월에 당시 규장각 제학 서명응은 평안도의 재원을 이용하여 규장각 운영비로 삼을 것을 제안하였다. 별향곡 등 여러 명목의 곡물들이 보관되어 있으므로 이 가운데 5만석을 밑천으로 삼아 환곡으로 운영하면 1만 5천 냥의 수입이 생길 것이므로 이를 규장각 운영비로 쓰자는 것이었다. 정조는 좋은 방안이라 생각하였으나 홍국영은 두 가지 이유를 들어 반대하였다. 평안도의 재원은 유사시에 대비하여 비축된 것이므로 함부로 사용할 수 없으며, 재원 마련을 위해 조정에서 앞장서서 환곡을 운영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일성록』 정조 1년 8월 20일(계축)).

『일성록日省錄』(奎 12811)
규장각 재원 마련을 위한 의견 대립을 보인 서명응과 홍국영. 『일성록日省錄』(奎 12811) 정조 1년 8월 20일(계축) 기사 부분.


    환곡은 유사시에 대비하여 비축된 곡물을 일정 비율만큼 백성들에게 대여하고 이자를 붙여 받아들이는 것으로 국가의 입장에서는 묵은 곡식을 새로운 곡식으로 바꾸어 비축할 수 있는 수단이었다. 백성들로서도 춘궁기에 곡식을 빌려 종자나 식량으로 쓰고 가을에 갚을 수 있는 제도였다. 그러나 18세기 후반 이후로는 재정 수요가 커짐에 따라 일종의 정부 주관의 대여 사업이 되어 있었고 이익을 극대화하기 위해 규정된 비율 이상을 대여하거나 더 높은 이율을 적용하는 문제가 늘어나고 있었다.
    정조는 당장의 필요 경비를 마련하기 위해 평안도의 비축곡을 환곡으로 이용하자는 것이었고, 홍국영은 조정이 앞장서서 백성들에게 이자를 거두는 것은 환곡의 기본 취지에 어긋난다는 것이었다. 정조는 홍국영의 의견을 일단 수용하였으나 이후에도 다른 방도가 없다는 이유로 여러 차례 평안도 곡물을 이용하자고 하였다. 홍국영은 그때마다 극력 반대하면서 호조와 병조에서 비용을 조달하자고 제안하였다. 그러나 호조와 병조 역시 재정이 넉넉한 것은 아니어서 규장각 운영비 마련은 쉽지 않았다. 결국 규장각 재정 문제는 홍국영이 물러난 후에야 해결되었으며 전라도와 평안도 여러 읍의 전답을 따로 배정해서 재정에 보충하도록 하였다(『규장각지』 권2, 잡식(雜式)).

순간의 몰락

    홍국영은 기존의 외척 세력을 척결하는 데 누구보다 앞장서서 정조의 뜻을 받들었으나 그들이 사라지자 스스로 외척이 되어 정국을 주도하려 하였다. 자기 누이동생 원빈이 입궐한 이듬해인 1779년(정조 3) 5월에 돌연 사망하자 정조비 효의왕후가 이에 연루되었다고 의심하여 내전의 나인들을 핍박하고 국문까지 하였다. 또 사도세자의 서자인 은언군 인의 맏아들 상계군 담湛을 원빈의 양자로 삼아 완풍군完豊君이라는 작호를 주었다. 완은 전주, 풍은 풍산이며 각각 왕실과 원빈 홍씨의 관향을 상징하였다. 정조의 후계자임을 은연 중 드러내는 작호였던 것이다.
    이와 같이 홍국영이 스스로 외척이 되려 하고 왕위 계승 문제에까지 개입하면서 개인의 권력을 키워가자 정조는 그를 내칠 결심을 하고 1779년 9월 26일 홍국영에게 스스로 물러나겠다고 언명하도록 하였다. 이날은 홍국영이 춘방 사서가 되어 세손이었던 정조를 처음 만난 지 만 7년 되는 날이기도 했다. 홍국영은 정조를 직접 대면하고 자신은 모든 관직을 버리고 물러날 것이며 다시는 정치에 간여하지 않을 것이라 다짐하였다.
    정조는 “지난 천년, 앞으로 천년에 우리 같은 군신의 만남이 다시 있을 수 있겠는가?”라고 그동안의 노고를 치하하였다. 이어서 “예로부터 흑발의 재상은 있었으나 흑발의 봉조하는 없었는데 이제 흑발의 봉조하가 있게 되었다.”라고 하면서 그에게 봉조하奉朝賀의 직함을 수여하였다. 봉조하는 은퇴한 정계 원로에게 특별히 하사하는 것으로 당시 32세의 홍국영에게는 최상의 대우에 해당한다.

권력의 무상함

    홍국영이 물러날 때 정조는 그를 최대한 예우하였으며, 1779년 12월 3일의 동덕회 모임에도 불러서 서명선, 정민시와 함께 어울리도록 하였다. 그러나 이것이 홍국영에 대한 마지막 예우였다. 이듬해(1780) 2월 홍국영은 도성에 들어오지 못하는 처벌[放歸田里]을 받았고, 병을 얻어 1781년 4월에 33세의 나이로 죽었다. 홍국영의 중요한 권력 기반이었던 숙위소는 곧바로 해체되었고 서명선이 호위대장이 되어 궁궐 숙위 임무를 맡았다. 그를 비호하던 송덕상도 역적으로 몰려 죽임을 당하였고, 잔여 세력들도 역모를 꾸민 혐의를 받아 모두 제거되었다. 이후 홍국영은 정조의 역적으로 불리게 되었으며 그러한 평가는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정조 치세 초년에 막강한 권력을 가졌던 홍국영이었으나 그가 원하는 방향은 정조가 바라는 탕평의 길과 지향점이 달랐다. 정조는 왕실 외척의 정치 간여 방지를 최우선 정책 목표로 생각하고 있었다. 이 때문에 영조 말년에 형성되었던 영조의 계비 정순왕후 경주 김씨 집안과 정조의 생모 혜경궁 풍산 홍씨 집안을 모두 제거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홍국영이 스스로 외척이 되려 한 것은 외척정치 청산을 중시하던 정조의 방침과 정면으로 어긋나는 행동이었다. 홍국영을 제거함으로써 정조는 외척의 간섭을 완전히 배제한 자신만의 탕평정국을 적극적으로 이끌어 나갈 수 있었다.
    규장각 경영에 대한 입장 차이 역시 이와 관련되어 있었다. 정조는 규장각 운영을 정상화시키기 위해 평안도 곡물을 환곡으로 이용하여 경비를 조달하려 했고 홍국영은 이에 반대하였다. 경비 마련 방안에 대한 논의 과정만을 보면 환곡 운영의 원칙을 고수하려 했던 홍국영의 입장이 옳은 것이었다. 그러나 정조는 홍국영이 책임 있는 자세로 규장각 체제 정비나 운영에 적극적으로 임하지 않았다고 생각하였다. 규장각이 정조 즉위년에 세워졌으나 시일이 지나도 체제가 정비되지 않았는데, 홍국영을 쫓아낸 후에 조정이 맑아지고 임금도 치도治道에 힘을 쓸 수 있게 되어 비로소 규장각의 제도가 정비되었다고 한 『정조실록』의 기사는 권력의 무상함과 함께 정조와 홍국영의 규장각에 대한 입장이 달랐음을 단적으로 보여준다(『정조실록』 권11, 정조 5년 2월 13일(병진)).

『정조실록正祖實錄』(奎 12743) 권11 정조 5년 2월 13일(병진) 기사 해당 면
『정조실록正祖實錄』(奎 12743) 권11 정조 5년 2월 13일(병진) 기사 해당 면.
“규장각奎章閣은 병신년 정월에 건립을 시작하였으나 규모가 초창草創이어서 해가 지나도 갖추어지지 못하였다. 그러다가 홍국영洪國榮을 쫓아내고 조정이 청명淸明하여지자, 임금이 더욱 치도治道에 힘을 써서 온갖 제도가 모두 제대로 시행이 되었다. 그리하여 여러 각신閣臣들에게 거듭 명하여 고금古今의 일을 참작하여 차례로 수거修擧하게 하니, 각규閣規가 비로소 환히 크게 갖추어졌다[奎章閣 始建於丙申初元 而規撫草創 閱歲未備. 及國榮屛黜 朝著淸明 上益勵爲治 百庶畢張. 申命諸閣臣 酌古參今 次第修擧 閣規始煥然大備].”


    기존 세력 척결에는 앞장섰으나 정조의 궁극적인 정책 방향과 지향점이 같지 않았던 홍국영은 정조의 치세를 끝까지 할 수 없었다. 홍국영 자신은 정조의 왕권 강화정책에 편승하여 자신의 권한을 키웠다고 생각하였으나 실제로는 정조의 권력 강화 과정에 이용된 것이었다.

글쓴이사진

  • 글쓴이
  • 강 석 화
  • 경인교육대학교 사회교육과 교수
  • 육군사관학교 교수부 사학과 전임강사
  • 서울대학교 규장각 한국학연구원 학예연구사
  • 주요저서
  • 『조선후기 함경도와 북방영토의식』, 2000, 경세원 등.